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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vy Jul 04. 2022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열 번째 독서 노트, 치누아 아체베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 작품의 기준 중 하나는 상황의 특수성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인간 감정의 조화이다. 치누아 아체베(이하, 아체베)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상황의 특수성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아프리카라는 점에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필자에게 평생 중남부 아프리카 땅을 밟아 볼 기회가 올까? 젊어서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늙어서는 길고 긴 비행시간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정말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아프리카를 방문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30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한 권의 책이라면 아프리카의 정취를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한편,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 오콩코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 속에 본인의 눈앞에서 일생의 가치관과 신념이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목격해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비트코인 투자가 한창 떠오를 때 탄생한 젊은 억만장자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회의감과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떠올랐다. 이처럼 시대 막론하고 통제 불가능한 새로운 시류가 덮쳐왔을 때 인간의 다양한 반응 중 한 가지, 공포와 좌절감을 정밀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구 정반대 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상남자 콤플렉스


오콩코의 남성성 콤플렉스는 그에게 성공의 원동력이자 파멸의 씨앗이었다.
    오콩코의 집안 단속은 엄격하였다. 부인들, 특히 젊은 부인은 그의 불같은 성격을 항상 무서워했고,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하지만 그는 평생 어떤 두려움 속에 살았는데, 그것은 실패와 유약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중략) 그 두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즉 그가 아버지를 닮은 것같이 보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그는 아버지의 실패와 유약함을 원망했으며, 같이 놀던 친구가 자기 아버지를 아그발라라고 흉보았을 때 느꼈던 수모를 오늘날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치누아 아체베,「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조규형 역, 민음사, 2008, pg.22-23

    오콩코는 흙수저 집안 출신이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본인은 절대로 아버지의 행보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능력과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이루어 낸다. 넉넉한 재산, 여러 명의 부인, 남자로서 명예의 상징인 칭호까지 얻으며 오콩코는 부족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한심스러웠던 아버지는 오콩코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만들지언정 가난남성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오콩코가 성인이 되어서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가 생각보다 깊었던 모양이다. 특히, 오콩코는 남성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유약하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종종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자가 다가와 도끼를 치켜들자, 오콩코가 눈을 돌렸다.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가 떨어져 땅 위에 부서졌다. 오콩코가 이케메푸나에게 달려 나가자 "아빠, 사람들이 날 죽여요!"라는 외침이 들렸다. 두려움에 휩싸인 오콩코가 자신의 도끼를 빼 소년을 내리쳤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g.76

    심지어는 자신의 양아들 이케메푸나를 본인의 손으로 직접 처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케메푸나는 오콩코의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서 데려온 공남(貢男) 이었다. 이케메푸나는 부족 사회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오콩코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머잖아 오콩코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삼 년 후, 이케메푸나는 결국 처형될 운명에 처해진다. 정든 이케메푸나를 떠나보내야 하는 오콩코의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남자들로부터 나약하게 보이는 것이 더욱 두렵고 싫었다. 결국, 오콩코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는 종국에 본인 파멸의 씨앗이 된다.



완전한 몰락


    오콩코의 유일한 선택은 부족을 떠나는 것이었다. 부족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범죄였고, 이를 저지른 사람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러한 범죄는 여성형과 남성형 두 종류가 있었다. 오콩코는 여성형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는데, 실수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칠 년이 지난 다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g.148

    이후 오콩코는 불의의 사고로 부족민을 살해하게 되고, 부족의 규칙에 따라 마을에서 쫓겨나 7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이케메푸나의 죽음 이후 줄곧 불안감에 휩싸여있던 오콩코의 내면이 그의 실수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오콩코는 장인어른의 부족 마을에 거주하며 재기를 준비한다. 그러던 와중 백인 이방인의 출몰과 인근 부족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콩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백인들의 물결은 빠른 속도로 오콩코의 부족까지 덮쳐 왔다.

    오콩코가 유배되었던 일곱 해 동안 우무오피아는 많이 변했다. 교회가 들어와 많은 사람을 탙락하게 했다. 단지 하층민이나 부랑자만이 아니라 가끔은 부자마저도 교회에 들어갔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오그부에피 우곤나로서, 그는 칭호를 둘이나 가지고 있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발목의 칭호 장식을 잘라 내던지고는 기독교도들에 합류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g.204

    오콩코가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복귀했을 때 마을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백인들은 선교사를 통한 유화책으로 오콩코 부족을 섭렵해 나갔다. 기독교의 만인 평등사상은 부족 사회의 하층민을 감화시켰고, 부족의 토속신앙이 하나둘 미신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세력은 날로 확장되었다. 물론, 백인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부족의 전통이 쇠퇴해가는 현실에 반감을 가지는 부족민들도 상당했다. 오콩코 역시 그중 하나였고 그의 장남 은워예 역시 기독교 신자가 되자 기독교와 백인에 대한 오콩코의 증오는 증폭된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 광신도들이 마을의 조상신 역할을 하는 에구구의 탈을 벗기는, 부족 사회의 중대한 금기를 깨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기독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족민들을 중심으로 교회 파괴 운동이 벌어진다. 오콩코를 필두로 한 마을 남자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오콩코와 남자들은 이후에 열린 백인들과의 교섭 자리에서 잠시 무장해제를 하고 방심한 틈에 백인들에게 강제 진압당하여 구치소로 끌려가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이후 오콩코는 구치소에서 풀려났지만, 백인들에 대한 분노와 짓밟힌 남자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열망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마을에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백인 하수인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돌발행동을 한다.

    기다리던 배경들이 갑자기 혼란스럽게 살아났고 집회는 멈추었다. 오콩코는 죽은 남자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는 우무오피아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군중이 다른 전령들을 도망가도록 놔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군중은 행동하는 대신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런 혼란에 내재한 두려움을 감지했다. 그에게 이렇게 묻는 목소리도 들렸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그는 도끼를 모래에 닦고 떠났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g.240

    과거 오콩코는 부족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말과 행동을 지지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콩코는 사건 현장을 떠나 인근 숲에서 스스로 목을 매단 채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오콩코 부족의 최후를 암시하는 다음 구절과 함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g.244



마무리


    오콩코의 죽음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는 진정한 남자라면 자신의 여자와 자식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부인과 자식들을 무책임하게 남기고 홀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오콩코는 그의 아버지처럼 끝내 '남자'가 되지 못했다. 오콩코의 자결이 어떤 대의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돌발행동은 독립운동처럼 부족민들의 단결과 저항을 이끌어낸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백인들이 도발 행위를 빌미로 오콩코의 부족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 있는 좋은 명분만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콩코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콩코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무너진 상태였고,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구치소로 끌려가면서 백인들의 물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의 벽을 누구보다도 실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콩코가 애당초 남성성을 유연하게 해석했다면 이야기의 방향은 덜 비극적으로 흘러갔을 것 같다. 비극의 시발점인 이케메푸나 처형일에 만약 오콩코가 부족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남성성'을 발휘하여 본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함으로써 이케메푸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냈다면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 자식이 죽도록 방치하는 것은 전혀 아닐 텐데 왜 평소처럼 고집을 부려보지 않았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 그랬다면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유배를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여전히 부족민에게 인정받은 리더십을 바탕으로 향후 백인들과의 문화 충돌에서 백인들에 대항 가능한 단결된 힘을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콩코는 본인이 정의한 남성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바람에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서 무너진다. 우리도 오콩코처럼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맹신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단한 나뭇가지보다 유연한 잡초가 강풍에는 더욱 강한 법이다.



인용 출처 - 치누아 아체베,「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조규형 역, 민음사, 2008

이미지 출처 - www.freepik.com (All photos used in this article are designed by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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