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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vy Jan 03. 2022

싯다르타

네 번째 독서노트,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이하,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주인공 싯다르타가 인생의 진리를 깨닫기까지 길고도 긴 여정을 그려냈다. 그런데 필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주목한 부분은 깨달음의 내용보다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었다. 소설에서 싯다르타와 그의 친구 고빈다는 함께 출가하지만 도중에 구도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노년에 싯다르타와 고빈다가 다시 상봉했을 때 싯다르타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상태였지만 고빈다는 여전히 구도의 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성인인 부처, 고타마에게 귀의했던 고빈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한때 술과 도박에 탐닉하여 나락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던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깨달음의 비결


싯다르타는 강물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다.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결정적 차이는 누구로부터 깨달음을 얻고자 했는가이다. 고빈다는 고타마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진리를 얻기 위해 선각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좋은 길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싯다르타는 진리는 타인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고 오로지 스스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고타마의 앞에서 당돌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강한 확신을 가진다.

    당신은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중략)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싯다르타」, 박병덕 역, 민음사, 2020, pg.55

    싯다르타는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인생을 배운다. 바라문에게서, 사문에게서,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상인에게서, 도박꾼에게서, 뱃사공에게서, 자신의 아들에게서 등등. 그들이 싯다르타에게 직접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사유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도중에 조금 헤맬지언정 결국에는 진리를 향해 전진해나갈 수 있었고, 마침내 싯다르타는 강물을 통해 부처가 깨달았던 인생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한편, 고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젊은 승려로부터 존경을 받는 노승이 되었다. 그러나 고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데 열중한 나머지 그것들이 내포한 원리에 대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 결과 고빈다는 진리의 주변에서만 계속 맴돌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와 고빈다 모두 스승이 있었다. 싯다르타의 가장 큰 스승은 강물이었고 고빈다의 가장 큰 스승은 부처였다. 싯다르타는 강물에게서 진리를 스스로 배웠고 고빈다는 부처에게서 진리를 구했다. 그리고 싯다르타만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싯다르타의 깨달음


    이 모든 파도와 물결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여러 목표를 향하여, 폭포, 호수, 여울, 바다 따위의 수많은 목표를 향하여 급히 흘러가, 모두 제각기의 목표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목표에는 하나의 새로운 목표가 뒤따르고 있었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
「싯다르타」, pg.197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서로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기쁜 소리를 슬픈 소리와 구분할 수도, 어린애 소리를 어른 소리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싯다르타」, pg.198

    강물은 폭포, 호수, 여울, 바다, 수증기, 비, 시내, 그리고 또다시 강이 되어 그 모습은 변할지언정 영원히 나아가고 흘러간다. 이러한 순환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비단 강물뿐 아니라 만물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돌멩이는 흙이 되고 흙에서는 식물과 동물이 탄생하며 이들은 다시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고로 돌멩이는 흙이기도, 짐승이기도, 나아가서는 부처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의 단일성, 이 세계가 이미 완성된 단 하나의 상태라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생과 사, 소년기와 노년기, 너와 나, 기쁨과 슬픔 등을 구분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깨달은 인생의 진리이다.



마무리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후략)"
「싯다르타」, pg.206

    우리는 싯다르타가 살던 시대보다 지식을 얻기 훨씬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어떤 분야의 스승이든지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지식을 쉽게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식들을 하나로 꿰는 진리를 얻기는 더 어렵게 되었다. 지식에 대한 쉬운 접근이 스승에 대한 의존을 높이고 스스로 사유할 기회를 잃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좋은 스승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와 동등한 수준의 지식은 갖출 수 있을 수는 있어도 그만큼 지혜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주체를 항상 '나'로 설정하는 것, 진리는 누구도 떠먹여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인용 출처 - 헤르만 헤세,「싯다르타」, 박병덕 역, 민음사, 2020

이미지 출처 - www.freepik.com, 유료 라이선스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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