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n ( ) line> 드라마터그 양은혜와의 대화 2
공연예술에 대하여: 2020(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코로나로 인해 무용이 몸으로 전달 웹상에 올라가는 방식이 꼭 영상이어야 할까? 영상이 아닌 방식으로 온라인 혹은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이슈를 무엇으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무용에 대한 연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재이기 이전에 이것이 몸이고 움직임이고 춤이라고 가기 위한 재료들을 들여다봐야 되겠다, 찾아봐야 되겠다, 그것이 실제 보이는 몸과는 다르지만 몸을 해석하는 재료로 찾아야겠다는 단계에서 연재라는 형식을 찾게 되었다. 상황에서 이뤄지는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상 안에 들어가는 방식 말고 어떤 방식으로 무용이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리서치로써 고민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게 하지? 대안이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들을 같이 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고민 또는 해결 또는 진행, 이동(넘어가야)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해보고 싶다. 그러나 현재 어디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게 하지?’
겪으면서 들었던 생각들, 그래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에는 아직은 미지수다.
양: 사실 무용의 언어, 움직임은 휘발되는 것이다. 어쩌면 무용인들은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는데, 위에 질문은 다르게 또는 낯설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떤 것을 보고 있었을까?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던 무용이 있었나?
전: 몸은 있었으나 있었던 흔적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휘발되기 이전의 상태를 가져오는 것 같다. 그것을 상상해내려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없이는 조금은 힘든 것이다. 이전의 감각과 기억을 재구성해서 감상자의 머릿속에서 재조직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실체는 없을 수 있는데 흔적들, 요소들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양: 이 연재의 대상은 공연을 본 관객일까?
전: 공연을 꼭 본 게 아니어도 몸을 춤이라는 것으로 감각해본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곳에 가서 주어진 것을 감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불러줘야 하는 과정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양: 이 부분에서 온라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무대와 몸을 벗어난 무용이라면 모두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책, 사물을 사용한 전시 등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관객 자신이 감각했던 것, 기억을 스스로 불러야 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는 온라인에서 관객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참여해 퍼포머와 참여자의 분리가 모호해진다는 이슈와 맞닿는 생각이 들었다.
전: 컴퓨터 앞에서 만들 수 있는 무용 공연을 생각한 적이 있다. 사적이지만 스스로 발생시킨 것이 현장성이 되는 것이다. 요소들을 가지고 본인이 느끼는 것으로 현장성을 가질 수 있고 그 감각으로 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하는 매뉴얼도 있다면 더 수행적일 것이다.
양: 무대 위에 퍼포머의 몸은 없어도 관객은 몸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코로나로 시작된 고민이지만 무대 위의 몸의 감각이 부재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자유롭다.
전: 거기에 조금의 애정을 더해준다면 가서 보는 공연보다 더 소중한 경험을 갖게 해 주는 공연일지 체험일지 무언가가 될 것이다. 나는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는 말이, ‘체험’은 안 쓰고 싶은 말이다. 현장학습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양: 나도 그렇다. 이미 관람에서 체험은 이뤄지고 있는 것인데 체험이라는 감각을 분리시켜 새로운 개념인 듯 양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걸까? 어쩌면 여기서의 체험은 참여와 결합된 단어인 것 같기도 하다. <키스 앤 크라이>처럼 아이의 장난감을 치우다 새롭게 만들어진 공연의 형식이 있듯 안무의 방식이 개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관람할 때도 감각이 바뀌지 않았나?
전: 띄어 앉기 때문에 나의 관람권을 더 보장받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꽉 차지 않은 극장에서 관람을 하는 것. 특히 무용공연은 관계자가 많이 오는 분야다 보니 개개인들끼리 친밀도 안에서 공연 관객들끼리의 응집력이 느슨해지는 것이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좋았다 안 좋았다의 호불호 문제는 아니고 다른 관극이 이뤄졌던 것 같다. 띄어 앉기까지 하면서 공연을 할 때 이렇게까지 공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죄책감,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최소한의 개인적인 거리를 객석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양: 나는 공연 속도의 감각이 달라졌었다. 위드 코로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전: 오프라인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은 아니고 이미 사람들이 1~2년 사이에 스스로 상황이 괜찮아졌다고 해서 마스크를 안 쓸까? 재택이나 온라인상으로 편리해진 것들이 몸에 익숙해졌다. 일찍 귀가한다든지 등이 몸에 쌓여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중간 지점에서 협의점이 생기지 않을까? 지금은 줌으로 회의하던 것들이 모두 다니면서 다시 한다고 하면 쉽게 그렇게 될까?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게 아닐까? 처음에는 그것만 당연한 것이었고 생각하고 활동했던 것이 막히면서 불편해졌다면 그것으로 인해 새롭게 생긴 행동 습관이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위드 코로나인데 나는 왜 아직도 이게 고민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