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
지쳐가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시나브로 나를 묻어 가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열정이 넘치던 20대를 넘기고 노련함을 가진 30대가 되었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곳이 지상 낙원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발휘해서 오롯이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고 그 곳에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공짜로 얻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내 자원을 총 동원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곳을 구현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잠을 줄여가며 살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돈도 아끼며 열심히 모았다. 하지만 시작할 때부터 내가 원하는 모습을 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래서 일단 뛰어들기로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늘고 길게 가자고 마음먹고 경험치를 늘리기 위해 우선 시작했다. 결국 잘 되지 않았다. 서서히 지쳐갔고 뭘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모든 것에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작은 점포로 시작해서 지인과 함께 샵앤샵으로 가게도 해 보았다. 친구와도 동업을 해 보았다. 여러가지 모양새로 내가 가려는 방향을 향해 가 보았지만 나에게 남는 것은 상처 뿐이었다. 모아 두었던 돈도 바닥이 났고 일상 생활마져 파괴되고 있었다. 어느덧 내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흘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렵게 어렵게 부여잡고 있는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뚜렷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갈 곳이 없었고 쓸 돈이 없다보니 부모님에게 빌붙어 살 수 밖에 없었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려다 보니 두 분의 생활 패턴을 따라야만 했다. 아침에 일찍 기상하고 반드시 아침 밥을 먹어야 하고 삼시 세끼 거르면 큰 일인 듯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밥숟가락을 들어야 했다. 군 내무반도 아닌데 밤 10시면 소등을 해야했다. 물론 이불 속에서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았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아침일찍 몸을 일으켜야했다.
그 시절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의 의미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잃었고 방향을 놓쳤다. 나는 왜 이 곳에 놓여져 있는 것인지 묻고 또 물었지만 찾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 아래에 부모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을만큼 두 분의 생활 패턴을 따라가면서 나는 내 세상에 나를 가뒀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던 그 삶의 리듬이 날이 풀리면서 내 안의 세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봄이 되니 볕이 따뜻해졌고 땀을 흘리고 나니 기분이 개운해 졌다. 샤워를 하고 나면 노곤한 피로감으로 죽은 듯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하루가 시작이 되면 어제와는 조금 다른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던 나는 계절이 바뀌면서 나를 일으켜 새우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밖을 나가는 것은 꺼려하지 않는다. 주로 산을 타고 공원을 걷는다. 사람이 많은 시간은 가능하면 피하고 오롯이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곳에서 혼자 시간을 갖는다. 그게 좋다.
조금씩 나를 일으키다 보니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걷고 나서 마시는 시원한 캔맥주,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카페라떼, 더운 여름 매일 일과를 시작하게 하는 아이스아메리키노,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맛있는 식사 등등 고민없이 즐겼던 일상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깨달으면서 다시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섰다.
지금 나는 적당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을 버리고 당장 내 눈앞에 있어 내 손에 잡히는 것부터 잡아놓기로 했다.
진입장벽이 낮은 직군을 골라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매달 따박따박 돈도 통장에 꽂히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시간을 위해 투자를 하고 있는 중이다.
3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안정을 찾고 내가 나아갈 바를 직시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용기 내어 한 발 앞으로 내디뎌 보았는데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제는 이 평범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선물같은 일이 펼쳐졌다. 마치 나를 응원하는 것같은 드라마를 만났고 나는 요즘 눈물나게 행복하다.
경기도 경계선 끝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삼남매는 매일 아침 서울로 출근을 한다. 저녁 약속이나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세 명이 각자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나 택시 한 대를 타고 함께 귀가한다. 치열하게 살고있으며 피곤하게 일상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들이 현 직장인들의 애환을 잘 드러내 주고 있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이맛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너무 나와 닮아 있는 사람은 오히려 피하고 싶어지는 마음이랄까.
주말에는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 염가네 소유는 아니지만 비어있는 땅을 그냥 두지 않고 이것 저것 먹을 거리들을 경작하고 있는 부모님을 도와 밭일도 한다. 어려서부터 해온 일이라 그런 것일까 아무도 투덜대거나 불평하지 않고 당연한 듯 일손을 거든다. 그리고 그들 안에는 외지에서 들어와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구씨가 있다.
시골살이 레전드 드라마 전원일기 다음으로 식사 장면이 많은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염가네 식구들의 식사는 본격적이다. 먹는 시늉을 하며 대사 몇 마디 하고 장면을 전환하는게 아니라 직접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각자의 표정들이 모두 클로즈업된다. 대화의 주체가 아니어도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들의 반응도 다채롭다. 무더운 여름 밭일을 마치고 와서 해질 무렵 평상에 앉아 먹는 저녁 식사는 정말 꿀맛일 듯하다.
구씨와 염가네 막내딸 미정은 동선이 자주 겹친다. 미정은 주말마다 농사일을 거들고 틈날 때마다 어머니의 식사 준비를 거든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출근길에 마주하게 되어도 서로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지나친다. 집 앞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고추밭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미정과 씽크대 공장으로 출근하는 구씨는 데면데면하다.
하지만 오늘은 구씨를 의식하게 되었다. 어느 겨울 갑자기 연고도 없는 그가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매일 술에 취해 집 밖을 나오지 않았던 그가 날이 풀리면서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별다른 인식을 하지 않았었는데, 어머니가 당부한 9시보다 두 시간이나 이른 7시에 출근을 하는 그를 보고는 잠시 멈칫한다.
알코올 중독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을 하러 나오는 그의 모습이 마냥 자신을 포기해 버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여서 였을까.
긴 이야기를 16회만에 모두 녹여 내려다 보니 첫회부터 스토리의 진행이 빠른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친절하지는 않다. 행간을 읽어 내야 하고 사건의 앞 뒤를 추측해 내야 한다. 모두 시청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 또한 쏠쏠한 재미를 준다.
돈을 빌려가서 잠적한 전 남자친구 때문에 독촉장이 집으로 날라 올 것을 알고 미정은 우편물 수령을 부탁하기 위해 구씨와 처음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쳐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부탁이 쌩뚱맞을 법 하지만 구씨는 그러마 한 듯하다. 평소 얼굴에 희노애락을 드러내지 않던 구씨가 미정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나와 내 이웃들의 리얼 생존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드라마가 오랜만에 나를 격하게 감동시켰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스토리를 따라 잡느라 첫 회부터 세 번을 다시 보아야 했지만 보면 볼수록 각각의 캐릭터에 애정이 생기고 감정이 이입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나와 닮은 것이 아니라 모든 캐릭터 안에 조금씩 내가 들어 있었다.
세속적인 듯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염기정, 가벼워 보이지만 매사에 진심인 염창희, 웃을 일 없지만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염미정, 죽지 못해 사는 구씨, 그 외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애틋하다.
드라마를 보고 나면 나와 대면하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 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것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 낸 거에요. 언젠가를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한테 난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겠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만나지도 않은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 본문 중 미정의 독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