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리트의 시작
단 하루의 단판승부인 리트가 지나고 난 후, 본격적인 로스쿨 입시 ‘포스트 리트’ 시기가 찾아왔다.
포스트 리트에는 크게 두 개의 퀘스트가 존재했다.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양대 산맥이 그것인데, 리트가 엄청난 순간 체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단거리 달리기라면, 자소서와 면접은 긴 호흡으로 지난한 연습과 퇴고를 거쳐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에 가까워 보였다.
로스쿨 입시는 처음이다 보니 자소서와 면접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다만 주변에서는 학교 커뮤니티에서 스터디를 구해 자소서를 작성한 후 돌려보며 첨삭해 주고, 모의면접도 진행하면서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형 미안한데 우리 스터디는 자리가 다 차버렸네ㅠㅠ"
같이 스터디를 할까 해서 연락해 본 후배는 자리가 다 찼다고 했다.
'학원을 가기엔 비용대비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랑 스터디를 할 수밖에 없겠네.. 오히려 아는 사람들이랑 하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서로 평가할 수 있긴 하겠다..'
결국 학교 커뮤니티에서 스터디를 구하기로 마음먹고 스O라이프에 들어갔다. 마침 입시철을 맞아 커뮤니티에는 자소서/면접 스터디를 구하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고, 그중 깔끔하고 진중하게 작성된 글을 골라 참여 요청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교육과 전공한 ooo이고,..."
학부의 마지막 학기를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터디가 시작됐다. 서울대입구역 근처 스터디카페 룸에서 처음 만난 6명의 스터디원들은 서로 다 처음 보는 사이였고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스터디장은 사회교육과 재학 중이던 누나였는데 부드럽지만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 스터디원들도 모두 순둥순둥 느낌이라 첫 느낌이 좋았다.
"자기소개서는 1차, 2차, 3차 데드라인을 정해 작성한 후 각 차수마다 서로 돌려 읽으면서 피드백을 해주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저희 스터디는 면접 스터디까지 같이 하는 걸로 모집한 거니, 자소서 제출 이후에는 면접 교재의 기출문제로 모의면접을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스터디장 누나의 매끄럽고 주도적인 진행에 다들 마음이 든든해진 표정이었다. 다들 합격에 대한 설렘과 입시 과정에 대한 긴장감을 함께 가진 표정으로 약 3개월여간의 마라톤이 시작됐다.
좋은 기세와 달리 책상에 앉아 커서만 깜빡거리는 빈 한글 화면을 쳐다보니 막막했다. 그러다 문득 대학교 입학 새내기 시절에 봤던 자전 커뮤니티 글이 떠올랐다. 2016년 당시 서울대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자유전공학부 선배님이 쓰셨던 글이었는데, 오랜만에 자전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려 해 보니 서버 비용 문제로 폐쇄된 지 꽤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원본 글을 찾을 순 없었지만, 새내기 시절부터 로스쿨 준비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정독했던 글이라 꽤나 인상 깊게 남아있어서 내용을 떠올리는 게 어렵진 않았다.
'자소서는 분명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항목별 질문에 힌트가 있다 그랬던 것 같은데.. 학교별로 문항별로 지원자의 어떤 자질을 보고 싶은 건지 파악하고 쓰라 했던 것 같아.'
그렇게 일단 자소서의 문항을 빤히 째려보니 대충 어떤 항목에 어떤 소재를 넣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일단 학부 시절에 작성했던 모든 소논문, 들었던 모든 수업, 했던 모든 대외활동을 나열해 본 뒤 '국제공법 전문가'라는 내 테마에 맞추어 문항별로 소재를 분배했다.
자소서의 전체 테마를 잡고, 소재를 적절히 배치하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들었지만, 실제 작성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각 소재별로 문제의식-배운 내용-느낀 점의 삼단 구조를 유지했고, 소재별로도 문제의식이 이어지게끔 신경을 썼다.
"진성님 자소서는 확고한 테마가 있고, 공부도 많이 한 게 티 나고 이것저것 활동도 많이 한 거 같은데 조금 현학적인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활동 하나하나 내용도 너무 구체적으로 작성한 거 같기도 합니다..!"
자소서를 작성해 나가며 스터디에서의 첨삭도 계속됐다. 다른 사람들의 자소서를 보니 확실히 조금 더 간결하게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원체 서술 스타일이 만연체에다가 활동의 내용을 자세히 써야 조금이라도 읽는 교수님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봐도 학부생들이 한 활동이 고만고만하고 몇 개만 읽어도 재미없는데, 교수님들은 몇백 장 읽으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이런 생각도 들자 무언가 내 자소서에도 '킥'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똑같은 서류 더미 속에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자소서의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 읽는 사람 입장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한 조각이 뭘까..
순수 재미 GOAT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슈퍼 집돌이 아싸였던 내 대학생활을 크게 반추해 보던 중.. 나름 신비로웠던 경험이 하나 떠올랐다.
2017년 자유전공학부가 서울대-북경대-도쿄대 교류를 추진하면서 겨울방학에 4박 5일 정도 도쿄대 학생들과 함께 나가사키 인근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군함도가 메이지 산업유산의 일부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일본인들은 메이지 산업시대~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까지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군함도 현장을 방문해 유네스코 등재 조건이었던 '강제징용 사실에 대한 설명 및 고지'를 실제 행하고 있는지 살펴볼 목적이기도 했다.
나가사키의 박물관, 미쓰비시 중공업 박물관 등을 살펴보며 느꼈던 점은 일본이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굉장히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는 기시감이 들었던 점은 메이지 산업혁명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 '가해자로서의 역사'는 은폐되거나 최소화된 채, '피해자'로서 평화를 추구하는 점만 강조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다.
군함도에 실제 상륙하여 잿빛의 고요하고 황량한 풍경을 마주한 것도 인상 깊었다. 현지 가이드에게 번역기로 돌린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강제징용 사실은 따로 설명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던 것도 인상 깊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그 모든 장소를 처음 보는 도쿄대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점이었다. 5일 여 동안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며 양국의 대학생활, 정치, 역사 등에 대해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엉망진창 얘기를 꽤 많이 나눴었는데, 내가 겪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경험, 시각들이 재미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도쿄대 친구들은 한국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역사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고, 한일관계의 큰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도 관심이 많았었다.
당시에는 자소서를 위해 했던 활동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대학생활 중 가장 재밌었고 큰 깨달음을 주었던 활동이기도 했다. 국제공법은 국제적 사이즈의 큰 분쟁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활자화된 책 속의 법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현실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던 경험이었다.
이 이야기를 자소서 4번에 적은 후 나는 자소서에 무언가 살아있는 생동감 한 방울이 들어간 느낌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서류 접수일 서울대 로스쿨 행정실에 직접 들러 필요서류를 모두 제출한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차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다.
결과는 서울대와 고려대 로스쿨 모두 1차 합격. 시곗바늘은 마지막 면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