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 기억의 끝에~~
아지랑이가 봄의 향연에 손짓하며 피어오를 때, 서쪽에서 소쩍새가 날아올라 하늘에 한 폭의 그림을 수놓는다. 아이들은 겨우내 사랑방에서 공기놀이를, 토방에서 땅따먹기를 한다. 하던 놀이들이 서서히 담벼락을 넘어오는 꽃바람에 들판으로 비탈진 산으로 놀잇감을 찾아 분주히 몸기지개를 키울 때, 어른들은 논에 물을 대랴 밭에 고랑을 파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몸과 마음이 종종걸음으로 바쁜 계절이 왔음을 알린다.
도시로 나가 공부하는 아들들,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딸들도 모내기철에는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품을 보태는 계절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모내기다.
주말을 끼고 휴가를 내서 시골로 내려갔다. 새벽 다섯 시에 동네 친척들은 품앗이로, 아버님, 어머님, 남편, 시동생들도 논으로 나섰다. 새참을 챙겨야 하는 몫은 여자들이 할 일이다.
손아래 바로 큰 시누이 그 밑으로 둘째, 셋째 시누, 나까지 네 여인들은 부엌으로 설강으로 분주하다. 고기를 삶을 불을 지피며 나물을 데쳐 무치며 두 가지 일을 하는 큰 시누이, 묵밥으로 육수를 내고 고명을 만드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손아래 시누이들이지만 익숙한 손놀림들이 남다르게 빠르고 매섭다. 밤늦게 도착해서 잠을 설친 데다 불을 지펴 가마솥이 끓어오르는 만큼 연기에 눈이 벌써 따갑다. 낯선 부엌이라 손에 익지 않은 도구들이 안개가 낀 것 같은 눈만큼이나 어설프다.
함지박에 음식들을 챙겨 담고 시누이들은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아 똬리를 만들어 머리에 얹고 함지박을 올린다. 주전자 두 개를 같고 따라오라 한다. 막걸리 주전자와 보리차 물 주전자다.
맨 끝에 서서 종종걸음으로 논두렁길을 따라간다. "어이야"하면 숙였던 허리들을 다 같이 따라 펴고, "어이야"하면 다시 똑같이 허리를 숙여 모를 꽂는 모습이 아스라이 멀리 보인다. 먼 길이 아닌데 유난스럽게 멀게 느껴지며 아득하게 눈이 안개가 낀 것처럼 스르르 감기듯이 한줄기 빛이 빠르게 지나친다.
잠깐 잠이 들었나 싶은데 누군가 나를 업고 뛰고 있다.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곧 심장이 멎을 거 같은 숨소리다. 옷을 보니 남편이 나를 업고 집을 향해 뛰고 있다.
"내려줘도 돼."
못 들었는지 그대로 뛴다. 집 평상에 나를 눕히고 보리차를 먹인다. 눈을 뜨고 하늘을 본다. 대나무 숲이 소소한 바람을 보낸다. 논바닥에 엎어진 나를 모내기를 하던 사람이 업고 뛰어 왔으니 둘의 몰골이 가히 상상이 간다. 둘은 마주 보며 웃는다.
첫 번째 모내기는 허망하고 민망스럽게 기억 속으로 소멸되어 옅어졌다.
도시생활은 남의 시선이나 사생활에 가까운 지인들이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시골은 이웃의 사생활에 관심들이 많다. 문화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취미가 결여되어 있는 탓도 한몫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짹짹거리듯 매사가 관심이 유난하다.
퇴근길 친정아버지가 집 입구에서 이장아저씨와 언성이 높아지신다. 식구들이 마당에 나와서 들으니 우리 집 딸들이 이장아저씨께 인사를 안 한다고 아버지께 훈계를 하시는 중이셨다.
"내 딸들이 당신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우리 아들들은 어르신들 보면 90도 인사들을 하네만, 당신 자식들은 나를 보면 피해 다니던데? 죄지은 사람 마냥."이라고 핀잔을 주시더니 휙 돌아서서 대문으로 들어가신다.
"인사 안 해도 된다. 지 까짓게 우리 딸들 보고 인사는 무슨."
권위의식이고 직업의식이 있으셨지만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덕망 받는 분이셨다. 나쁜 사람에게는 어느 양보도 없는 독재정권 시절, 까만 승용차가 권위의 상징인 듯 관용차로 사용되던 시절이었지만 퇴근길에 노점에서 나물이나 곡식 등을 파시는 할머니들을 보시면 꼭 차에서 내려 떨이를 해 오셔서 엄마를 당황하게 하시곤 하셨다. 생활기록부에 우리 육 남매들 어디에도 인성이 잘못되었다는 문구는 없었다. 의리와 용기, 거기에 나에겐 조용함이 덧붙여졌다.
시골을 내려가다 보면 마을 초입에서부터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 매번 남편은 차에서 내려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다. 난 차창을 반쯤 내리고 45도 인사를 한다. 이게 화근이다. 육촌 당숙이 건너오셨다. 며느님이 참으로 거만스럽다고들 하니 그것도 맏며느리가, 아버님이 헛기침을 하신다. 그때 어머니가 과일을 깎으시며 "도시아이들은 생활이 바쁜 게 습관이 되서이기도 하니 조금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구먼요." 하신다.
'논두렁에 고꾸라져 버리는 거 보니, ㅇㅇ집 맏며느리는 얼굴이 유난히 희고 창백한 게 병이 있는 거 같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관심 속 참새 짹짹 소리는 한 번도 나에게 전해진 적이 없다.
아버님은 자식들과 며느리인 나까지 앉혀놓고 정치이야기 시국이야기 하시는 걸 좋아하셨다.
자식들 잘 가르치셨다는 자부심도 물론 작용하셨겠지만.
그 뒤로 모내기철에 난 시골을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2년 터울로 아이 둘을 낳고 기르느라 시골 가는 일이 엄두도 나지 않았고 사업도 바쁘기도 했지만, 그건 어머님의 보이지 않는 배려였고 맏며느리로써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님은 글을 모르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서 살아야 하는 세월이 글을 모르니 갑갑하다 하시면서 초등학교 방과 후 선생님 덕분에 금세 글을 깨우치시고 읽고 쓰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좋은걸. 글씨도 모르고 산 세월이 아쉽다." 하신다. 글을 모르셨으면 어떠한가, 항상 현명하셨는데.
동네 어르신들의 병약해 보였던 ㅇㅇ집 맏며느리는 30여 년을 아직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어머님께 '난 어머님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 하면 "넌 똑똑해서 좋았다. 돈도 잘 벌었지~" 하신다.
어머님 눈에 비친 똑똑한 며느리. 그 꿈을 깨트리고 싶지 않은 며느리는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건강하신 것에 감사드리며 가슴깊이 사랑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