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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Aug 08. 2022

쿨의 미래

적당히 핫하게


배우 윤여정이 ‘2021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고상한 척한다’(snobbish)고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아서 더 기쁘고 영광이네요.”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답게 솔직하고 재치 있는 답변이었다.


항공점퍼를 입고 출국하는 할머니. 예능에서 어린 배우들과 함께 음식을 대접하는 할머니. 나로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할머니. 그녀는 우아하다. 유머러스하다.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라이프 스타일 유튜버 밀라논나(70)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유튜버로서 은퇴 선언을 한 그녀는, 늙어서 좋은 건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멋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새로 출시된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 텐트를 치는 사람보다는 자신과 어울리는 티셔츠 한 장을 아껴 입는 게, 틈나는 대로 수정 화장을 하는 것보다는 무심하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멋있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이들만이 멋을 향유한다.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은 되려 우스워 보인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사람. 쇼미  머니에서 우승한 래퍼를 따라 비니를 눌러쓰는 사람. 이들은 쉽게 놀림거리가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따라 하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들이 우스워 보이는 이유는 언뜻 보기에도 자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드러나는  간단히 돋보이고자 하는 게으른 욕망. 쿨하지도 핫하지도 않다. 미적지근하다.


무심하면서 우아하고 쿨한 이미지. 멋을 떠올리며 파리지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속 파리지앵은 차치하더라도 프렌치 시크는 성공적으로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특유의 무심함이 파리지앵에 대한 환상을 증폭시킨다.


프렌치 시크의 상징인 부스스한 머리는 실제로 그들이 머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가능하다. 약간 번진 아이라인도 마찬가지. 파리지앵과 수정 화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워지면 지워지는 대로, 늙으면 늙는 대로 산다. 자연스러운 자신만의 분위기는 그런 행동에서 배어 나옴 직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만이 멋있을 수 있다.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 ‘코코 샤넬’은 말했다.

“나의 일은 샤넬 슈트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샤넬은 무려 100년 동안 쿨 했다. 1910년대 초반, 파리 여자 모두가 코르셋을 졸라맬 때 샤넬은 여성을 위한 슈트를 디자인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직접 만들며 솟아나는 욕망에 충실했다. 그녀는 모자에서 슈트, 향수까지 디자인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샤넬은 여성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여성으로 성공했다.


샤넬은 패션 브랜드 중 가장 보수적일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화보 촬영 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넬을 입히기보단 리바이스 501 청바지에 샤넬의 블랫 재킷을 입히는 등 ‘우리 옷은 어떤 것과도 섞을 수 있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힘을 줘야 할 것 같을 때 되려 힘을 뺀다. 그래서 패셔너블하다. 샤넬의 2019년 S/S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은 여름 해변을 무대로 진행됐다. 모래사장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모델들이 걸어 나왔고, 몇몇은 샌들을 손에 든 맨발 차림이었다. 샤넬다운 런웨이였다.


완벽이라는 개념은 누군가를 닮고 싶은 욕망에 기인한다. 완벽한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앞서 완성품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가 선행한다. 하지만 자신이 되는 일에 완벽이 있을 리 없다. 완벽한 자신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렌치 시크는 닮은꼴보다는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하는 일이다. 혹은 존재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청명한 해변가에서 옷을 껴입고 여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멋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진지한 사람도 멋있지 않다. 경박스럽게 웃으며 광대를 자처하는 사람도 그렇다. 멋은 이토록 복합적이다. 하지만 상황에 맞게 변주하며 행동하는 사람 만이 멋을 간직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나를 굽는 일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서두른다고 자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멋있는 사람은 희소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유한 열정을 따라가야 한다.


난 화염이 아닌 불꽃일지언정 선뜻 마음을 열고 싶다. 생각한 대로 움직이고 싶다. 은근한 열정을 따르고 싶다. 다행히도 내겐 북극성 같은 할머니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우아하게. 유머러스하게. 남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샤넬은 말했다. 스타일은 결코 늙지 않는다고.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스타일을 정해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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