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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29. 2024

실패하기 좋은 때

   오랫동안 존재한 암을 발견한 때는 외고 입시 때문에 서울로 전학한 딸이 마지막 기말고사를 본 직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암을 발견하기에 좋은 때였습니다. 더 빨리 발견했다면 수술과 항암치료 때문에 딸의 외고 입시를 포기했을 테고 더 늦게 발견했다면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딸이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뒤 실패하기 좋은 때가 언제였을까 복기해 보곤 합니다. 정확하게는 실패하게 내버려 둬야 했을 때, 실패할 권리를 주었어야 했을 때입니다. 태어난 직후부터 헤아리면 비례대표 투표용지보다 긴 선지가 등장할 것 같아 수능처럼 다섯 개의 선지만 뽑아 봅니다.


   1번은 초등학교 시절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첫 아이 교육 때 의욕이 과다합니다. 더 열심히 시킨 첫째가 둘째보다 수동적이고 공부에 실패하는 확률이 높은 이유입니다. 지름길이 보이니까 아이 손을 잡고 빨리빨리 재촉합니다. 쉬엄쉬엄 가려는 아이에게 지금 쉬지 말고 빨리 도착해서 쉬자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저기까지 갔다고 채근합니다. 부모 손에 끌려가던 아이가 목이 마르자 우물 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떠 마시려고 합니다. 아이가 두레박의 사용법을 고민하려는 찰나, 부모는 생수병 뚜껑을 따서 아이에게 건넵니다. 빨리 마시고 가자고. 생각해 보면 이때가 실패하기 가장 좋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때는 회복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이때도 실패할 권리를 주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이 있겠지만 더 키우다 보면 알게 됩니다. 그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2번은 중학교 첫 시험 때입니다. 탁월하지는 않지만 평범보다는 나은 애매한 재능을 가졌고 시키는 것은 하는데 시키지 않는 것은 안 하는 학생입니다. 학생은 공부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워 시간을 분배하는 방법을 아직 모릅니다. 한 학기나 두 학기 시험을 망치고 나면 스스로 터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차피 원하는 학교 진학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도 실패하기 좋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부모가 세워 준 계획으로 부모의 관리 하에 좋은 성적을 얻습니다.


  3번은 전학 온 서울의 중학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시험 때입니다. 일반고에 진학하는 학생이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하는 학생보다 적은 것 같은 학교였습니다. 전학 온 지 2주 후면 시험인데 교과서도 다르고 심지어 배우는 과목도 다릅니다. 수준 떨어지는 경기도의 일반 중학교에서 했던 수행평가도 인정할 수 없다고 다시 평가받으라 합니다. 영어 듣기 평가만 전국 공통인지 인정해 주겠답니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몇몇 선생님들의 콧대를 꺾어 주고 싶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시험에서 삐끗하면 여태까지 한 공부와 서울로 이사한 수고까지 물거품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도 실패하기 좋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역시 부모의 도움으로 수행평가와 마지막 기말고사를 성공적으로 치릅니다.   


   4번은 외고 일학 년 때입니다. 입학 동기 중에 코로나라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 녀석을 피해 거의 이 년을 집에서 공부해야 했죠. 대부분의 학생은 침대가 옆에 있는데 책상에 굳건히 앉아 공부할 만큼 심지가 곧지 못합니다. 침대 위로 순간이동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시절입니다. 성인들도 할 일 있으면 집에서 나가 카페든 도서관이든 찾아 가는데 고등학생이야 말해 무엇합니까. 외고에 입학했는지 침대에 입학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학생이 드디어 스터디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서 안 하는 공부를 스터디카페에서 할 리는 만무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도 실패하기 좋은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부모와 함께 스터디카페에 갑니다. 부모는 학생이 십 분 후에 깨워 달라고 하면 깨워 주고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사다 줍니다. 결정적인 실패는 모면합니다.


   5번은 첫 번째 대학 입시 때입니다. 학생의 마음속 마지노선, 정확히 그 마지노선의 대학은 수시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하는 무색투명한 독가스처럼요. 수능을 잘 볼 수도 있는데 수시 납치를 당하면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분수를 모르는 생각을 학생과 부모가 모두 합니다. 최고의 점수를 수능에서 경신했다는 절대적으로 희귀한 경우가 내 일이 될 것만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안도 합니다. 만약 수능에서까지 실패하면 완전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것이니까요. 마지노선 이하의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결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학생은 드디어 대학 입시에 실패를 합니다. 친구들은 진짜로 저만큼 앞서 갑니다 아무리 좋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어도 고졸이 될 수는 없으니 재수를 합니다. 최루탄 가스보다 더한 독가스를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립니다. 이때 학생은 드디어 깨닫습니다. 절대로 삼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요. 그리고 마침내 연세대학교에 입학합니다. 또 결심합니다. 절대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을요. 학점의 중요성을 입학도 하기 전에 마음속에 새깁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열심히 리포트를 쓰고 첫 중간고사 때 생전 처음으로 밤을 새우며 공부를 합니다.


   부모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실패할 기회를 너무 늦게 준 것이 잘못인지, 실패할 기회를 너무 늦게 준 덕에 여기까지 왔는지. 확실한 것은 실패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실패하기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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