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필 May 22. 2024

암은 졸업하지 않는다

   어제는 12주마다 한 번씩 주사를 맞는 날이었습니다. 하루하루는 느릿느릿 지나가는데 주사일은 가난한 집에 제삿날 돌아오듯 합니다.


  뭐든 처음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수술에 항암 치료에 방사선 치료까지 끝나고 주사를 처음 맞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사의 정확한 명칭과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삶처럼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에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그러했듯 맞으라 하니 맞습니다. 다만 여성호르몬을 없애주는 약물을 넣는 것인데 굉장히 작은 고체 약을 주사로 넣기 때문에 주사 바늘이 매우 굵고 따라서 큰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첫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던 날 제 마음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고통의 역치가 남다른 저로서는 주사 따위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수술과 항암 치료를 갓 졸업했으니 세상에 두려울 고통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솜으로 배를 슥슥 문지른 간호사가 뱃살을 만지작만지작 하더니 그대로 주사기를 내리꽂았습니다. 찌르지 않고 꽂았습니다. 피 튀기는 영화에서 연쇄살인마가 사람 위에 타고 앉아 눈도 깜짝 안 하고 칼을 내리꽂는 것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살벌한 광경에 너무 놀라 아픔도 잊었습니다.


   수납과 처방전 받기 등 몇 가지 소소한 절차를 거치는 동안 잠이 쏟아졌습니다. 병원 회전문을 나서서 택시에 앉았을 때는 이미 반수면 상태였습니다.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모자는 벗겨져 있고 크로스로 맨 핸드백은 배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이 되돌아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왜 문지방 앞에 누워 있는 걸까. 갑자기 맹렬히 배가 고팠습니다. 허기의 역치도 상당히 높은 저로서는 생경한 배고픔이었습니다. 짜파게티를 하나 끓여 먹었는데 누군가 기억에 남는 한 번의 식사를 묻는다면 바로 그 짜파게티입니다.


   12주마다 주사 경력을 쌓으면서 알았습니다. 우선 뱃살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말로 그 쓰임이 있었습니다. 두둑한 뱃살을 움켜 쥔 후 한 움큼 잡힌 뱃살에 주사기를 꽂으면 환자도 덜 아프고 간호사도 편하다고 합니다. 저의 첫 주사를 놓아준 간호사 분이 뱃살을 만지작만지작 했던 이유를 나중에 알았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누웠을 때 한 움큼 잡힐 정도의 뱃살은 없었기 때문에 다소 과격한 모양으로 주사를 맞았나 봅니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간호사 분들은 엄지와 검지로 뱃살을 꼬집은 채 그 사이에 주사 바늘을 찔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 분마다 선사하는 아픔의 강도가 달랐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저는 언제부턴가 침대에 누워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나면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아부성 멘트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간호사 분들이 웃으시면서 이 주사가 워낙 아프죠, 하십니다. 어제의 간호사 분은 찌르는 사람도 긴장된다는 주사를 놓은 후 처음으로 1분 정도를 직접 힘껏 눌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물으셨습니다. 혹시 주사 맞은 후 피가 난 적은 없는지를요. 저는 주사를 놓은 후 붙여 주는 둥글고 귀여운 반창고에 약간 묻어날 정도의 피만 흘려 보았는데 그 정도가 아닌 환자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았습니다. 주사를 맞고 거리에 나섰는데 배에서 핏자국이 스멀스멀 번져 난다면?


   그리고 수납을 하다가 알았습니다. 곧 다가올 11월 11일이 제가 암 선고를 받은 지 딱 5년이 되는 날이라는 것을요. 치료가 끝난 후 5년까지 재발이 되지 않은 환자는 완치 그룹으로 편성됩니다. 이제 막 암의 세계에 진입했거나 곧 진입할 환자들에게 생존율 그래프를 끌어올려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러나 저는 치료가 끝난 날은 기억하지 못하고 암 진단을 받은 날만 선명히 기억합니다.


   2019년 11월 11일은 월요일이었고 병원문이 열리기도 전에 검사를 받은 병원에 도착했었습니다. 혼자였고 암 진단을 받았고 건국대 병원을 소개받았습니다. 눈물은 나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다지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 후 치료 과정은 물론 아팠습니다. 특히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는 지글지글 끓는 불에 온몸이 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침대에 닿아 있는 등짝의 살갗이 훌렁 벗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습니다. 어떤 표현도 진부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암과 관련된 고통은 제 삶에서 고통스러운 순간을 꼽았을 때 순위에 들지 못합니다. 금은동이 아니라 열 손가락 안에도 못 듭니다. 제 삶이 유독 고통스러웠다기보다는 고통을 느끼는 방향과 시스템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암은 자취를 감춘 것 같은데 후유증이 상당합니다. 원 플러스 원처럼 한 통 다 먹었는데 아직 한 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밥을 먹고 잠을 잤더니 항암 환자 최초로 몸무게가 늘어서 의사 선생님을 놀래켰던 저는 여전히 암을 진단받기 전처럼 살아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습니다. 텔레비전에도 휴대전화에도 유튜브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심심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국어 문법 문제를 풉니다. 쉬는 날 하루 종일 풀 때도 있습니다. 문법 문제는 어렵지만 답이 명쾌합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원칙에 충실하면 다 해결됩니다. 어제도 주사를 맞고 와 저녁 내내 문법 문제를 풀었습니다.


   11월 11일이면 중증 환자 산정특례 졸업입니다. 그런데 암은 5년제가 아닌 평생교육과정인가 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