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과 규정 넘어서기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네.”
“쓸모없는 것을 알아야 쓸모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법이라네. 저 대지는 얼마나 넓은가. 하지만 사람이 걷는 땅은 겨우 발을 디디는 얼마 안 되는 자리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발을 디디는 자리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싹 없애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도 사람들이 밟는 그 얼마 안 되는 땅이 여전히 쓸모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럼 그 땅도 쓸모없게 되지.”
“그러니까 쓸모없는 게 쓸모가 있다니까.(無用之大用)”
- 외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만을 유용하다고 여기고 그 나머지 대지와 광야는 나와는 무관한 무용지물이라고 여긴다면 내 존재의 터전은 얼마나 협애하고 위태로워질까.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안전한 것은 대지가 이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용은 무용 덕분에 존재할 수 있고, 쓸모 있음은 쓸모없는 것들 덕분에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개인의 상품화가 공공연한 현 사회에서는 쓸모없음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나 또한 처음 장자를 접할 당시 본 대목을 그저 허울 좋은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쓸모 없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것들을 세상이 필요로 하는 모습을 보기전까지는.
수년간 여러 정치인들이 쓸모없다는 이유로 지방 도시의 공공의료원을 철폐했다. 의과대학들은 예방의학과 같은 기초분야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홀대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펜데믹이 시작되자 공공의료원과 예방의학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않나.
평소에 쓸모없다고 홀대해온 것들이 한순간에 쓸모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우리가 평소 쓸모 있다고 믿어온 눈앞의 이익들은 순식간에 코로나 뒤에 숨어버렸다. 그것들이 사실은 쓸모없다고 생각한 것들 덕분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쓸모없음의 큰 쓸모 있음(無用之大用).’ 이런 상황을 두고 하기에 딱 좋은 말이 아닐까.
더 나아가, 쓸모 있음에 대한 추구는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자적하는 삶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장석(匠石)이라는 유명한 목수가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무성하게 펼쳐진 나뭇잎은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였고 나무의 굵기는 장정 백 사람이 아름을 두른 것과 같았으며, 높이는 큰 산을 굽어볼 정도였고 배를 만들 만한 크기의 가지들이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나무 둘레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제자가 물었다. “저는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니게 된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버리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대답했다. “그런 소리 말게나. 저건 쓸모없는 나무(散木)야. 저 나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어버리며, 가구를 만들면 바로 망가지고, 문짝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네. 저건 재목이 못 되는 나무야. 아무 쓸모도 없어서 저처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지.”
- 인간세
이 이후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날 밤 목수의 꿈에 나무가 나타나 말했다. “네가 쓸모를 말했느냐? 그래 그 쓸모있는 배나무나 유자나무, 하다못해 오이를 봐라. 열매가 열리기 무섭게 따 가지 않느냐?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부러진다. 그 쓸모 때문에 삶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 쓸모 때문에 세상의 해침을 입는 것이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다.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크게 자랐겠느냐!”
- 인간세
이처럼 ‘쓸모’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것이다. 타자가 용도에 맞게 소비하도록 자신을 소모품으로 내놓는 일이 수동태로서 ‘쓰임’이다.
따라서 쓸모있음은 본래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가치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쓸모’에 대한 ‘규정’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상식과 관행의 덫에 갇혀서 더 넓은 세계, 더 열린 세계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물을 쓸모의 틀로만 규정하려는 ‘유용성의 덫’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쓸모없다고 믿어왔던 것이 언제나 ‘무용(無用)’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공자를 비판한 사상가’로만 기억하는데, 이는 장자가 그토록 거부한 ‘언어적 규정’으로 그를 편견 속에 가두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 게 아니었다. 공자의 생각은 옳다. 다만 공자의 생각’만’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오류가 발생한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는 세상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눴다. 예의는 무례함을 전제했고, 덕은 부덕을 전제한 개념이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자. 예의가 있기에 무례도 있는 것이 아닐까? 덕이 부덕을 낳은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나누고 가르는 습관은 ‘같음’ 보다는 ‘다름’에 주목하게 한다. 공통분모를 버리고 여집합에만 집착하다 보면 어느새 ‘다름’은 ‘틀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마찬가지로 ‘쓸모’라는 것도 보기 나름이다.
세상은 단순명쾌하지 않다. 낮과 밤은 분명히 다르다. 밝으면 낮이요 깜깜하면 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낮이고 언제부터 밤인가. 해가 뜨면 낮인가? 해뜨기 전에도 이미 세상은 환하지 않은가? 해가 지면 밤인가? 해져도 노을 진 하늘은 여전히 환하지 않은가.
우리는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고, 스스로 그 규정에 발목 잡히는 상황을 조심해야한다. 흔히 우리들은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사 꼬인다. 쓸모가 있고 없고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무용한 것도 누군가에겐 유용할 수 있다. 그저 내가 선 자리를 조금만 옮겨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장자>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신선사상으로만 바라본다는 점인데,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말은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말이 아니다. 본성을 되찾자는 주장이다.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다. 규정 짓기를 피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억지로 상대를 바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 시선을 바꿔야 한다. 내 자리만 옮긴다면 해뜨기 전에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다. 내 시선을 바꾸는 노력, 내 자리를 옮기는 수고를 하기로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