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기 다른 경험의 폭을 가진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은근스레,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기 마련이다.
경험은 평생에 걸쳐 쌓인다. 하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적기는 분명 존재한다. 눈 깜짝할 새 성인이 된 나의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내 사고와 선택이 달라졌다. 그리고 독립된 인생이 시작된 20대 시절, 어떤 경험을 적극적으로 했는지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고 생활 모습이 달라졌다. 경험은 긍정과 부정을 떠나서 자산이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경험을 갖기 위해서는 '기회'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경험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 말은 즉, 어떤 아이들에게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그랬다.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국어 교과서 91쪽을 펴볼까요? 오늘 읽어 볼 논설문의 주제가 무엇이죠?"
"'동물원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맞아요. 오늘은 동물원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논설문을 읽어보고 여러분들의 생각을 적어볼 거예요. 여러분, 동물원 가봤죠?"
"......"
"아, 혹시 그러면 동물원 가본 사람 손들어 볼까요? 꼭 큰 동물원 아니더라도 동물을 돌보고,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는 곳이면 괜찮아요"
"......"
그때의 정적을 나는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면 동물원에 한 번쯤 가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점이자, 아이들 간 경험의 차이를 두 눈으로 마주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곳 아이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동물원을 가본 아이들이 한 반에 네댓 명밖에 안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비교군이 적긴 하지만, 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학교의 아이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동물원을 가본 경험이 있었다.
내심 당황했지만, 이 당황함을 비추는 것은 실례였다. 교과서를 읽으려 했던 계획을 바꿔 유튜브를 검색했다. 에버랜드와 서울대공원의 동물원 영상을 틀어주니 아이들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관심 있게 영상을 봤다. 종종 '가보고 싶다'나 '우와 귀엽다'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이들을 보니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걸로 충분한 것일까. 그래도 직접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배경지식이 쌓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떤 아이들에게 동물원은 당연히 겪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경험의 차이는 아주 일상적인 부분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힘겨운 월요일 아침에, 나는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교과서를 펴라는 말을 하기가 싫었던 교사였다. 정 없어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거니와, 활기차게 마무리했던 금요일이 겸연쩍게도 적막해진 아이들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졸린 아이들의 관심을 단번에 끄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스몰토크'였다. 월요일인 만큼 "주말에 뭐 했어?"라는 질문으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면 긴장된 분위기가 금세 풀리고, 1교시 국어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얘들아 주말 잘 보냈니? 뭐 하면서 보냈어?"
"......"
"가족들이랑 집에서 한 것도 좋고, 산책 다녀온 것도 좋고, 맛있는 음식 먹은 것도 좋아. 자유롭게 이야기해 볼까?"
"집에서 게임했어요"
"성재는 집에서 게임했고, 또 다른 친구는?"
"저도 집에서 유튜브 봤어요"
"혹시 어디 다녀왔거나, 맛있는 거 먹은 친구는?"
"......"
그다음 주도, 다다음 주도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게임'이나 '유튜브'를 이야기했다. 그래도 주말이니 한 두 명쯤은 박물관이나 놀이공원, 영화관 같은 장소에 갔다 오지 않았을까. 거창하지 않아도, 새로운 경험이 있었던 아이가 즐겁게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몇 주가 지나도 아이들은 특별히 한 일이 없었다.
다른 곳의 아이들은 각자 주말동안 한 일을 말하려고 늘 아우성이었다. 부모님과 카페를 다녀오고, 주말 축구교실에 다녀오고, 사촌동생들과 놀러 가거나, 영화관을 가거나 외식을 했다. 사소해도,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오로지 혼자 하는 게임, 유튜브가 전부였다.
아이들이 경험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경험을 자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리라.
큰 고민 없이 꺼내 들었던 "주말에 뭐 했어?"라는 질문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민스러운 영역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유달리 그 해 아이들이 순진하고 예뻤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평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고 도와주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교권추락이나 아동학대의 이슈가 덜했던 그 당시의 나는 겁도 없이 투철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해 6학년 영준이는 성실하고 착한 성품에 학구적 욕심이 있는 아이였다. 과학과 관련한 책 읽기와 토론을 좋아했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다. 특히 '광물'이나 '기생충'에 큰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영준이는 온몸에서 '저 하고 싶어요'의 기운을 내뿜는 아이였다. 눈빛은 항상 초롱초롱 빛났고, 세상 모든 것이 영준이에게는 놀잇감이었다. 하지만, 영준이는 조력이 필요할 만큼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하기엔 학교는 좁았다.
어느 날, 교육지원청에서 보내온 공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관내 5~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는 데 참여할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 관심 없이 꺼 버렸을 텐데 왠지 모르게 수업시간에 열띤 토론을 하던 영준이가 생각났다. 준비물로 노트북이 필요한 것이 마음에 살짝 걸렸지만,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영준아, 너 토론해 볼래?"
"네? 토론이요? 어디서 하는 건데요?"
예상했던 대로, 영준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지역에서 추천된 학생만 할 수 있는 건데, 영준이가 토론 워낙 좋아하니까 선생님이 추천하고 싶어서. 토론 전문 선생님이 수업해 주신대. 여기 시간표 봐봐"
"와, 진짜요! 제가 해도 되나요? 저 해보고 싶어요"
"그럴래? 엄마한테 여쭤봐봐. 노트북만 있으면 된대"
".. 아 노트북이요? 저 노트북 없는데.."
"아 그래? 그러면 컴퓨터나 태블릿도 상관없을걸?"
"제가 그런 게 없어가지고요"
영준이의 눈에 실망스러운 빛이 어렸다. 내가 잠시 당황하자, 영준이는 제안을 취소할까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어디서 빌릴 수 있을걸요? 제가 엄마한테 여쭤볼게요!"
그날 저녁, 영준이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영준이 어머니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나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선생님, 신경 써주셨는데 죄송해요. 저희가 당장 노트북을 빌릴 수가 없어서요. 그 토론 수업 참여가 힘들 것 같아 연락드렸어요. 영준이는 하고 싶어 하는데, 상황이 어쩔 수가 없어서 죄송해요."
영준이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속이 상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그리고 원인 모를 불공평함에 대한 분개심이 들었다.
"어머니, 제가 안 쓰는 노트북이 있어서 그거 쓰면 어떨까요? 영준이 이거 해보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제가 영준이한테 노트북 어떻게 쓰는지 가르칠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 시켜주세요."
어린 날의 치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참 주제넘은 일이었지만, 경험이 필요한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3주 동안의 토론수업이 끝나고, 영준이가 노트북 가방을 돌려주며 인스턴트커피를 건네던 게 기억이 난다. 영준이는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선생님! 수업 되게 재밌었어요. 엄마가 감사하다고 커피 가져다 드리래요."
모든 사람에게 경험의 기회가 공평하게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당연한 듯 여행을 가볼 수 있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놀러 가본 경험 자체가 없는 아이들도 많다.
체험공간에 많이 다녀서 오감이 살아있고 배경지식이 풍부하게 차있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기껏해야 유튜브 속 화면이 전부인 아이들도 있다.
좋은 학습환경에서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원하는 만큼의 배움의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아이들도 있다.
경험조차 기회를 얻어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매정하게도,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배우려 한다.
많은 아이들이 폭넓은 경험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조금은 여유롭고 너그러운 세상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