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인프피
전화 공포증이 있었다. 전화를 걸기 전 종이에 볼펜으로 할 말들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적어놓고 수화기에 낭송했었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에피소드는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작게 찢은 A4 용지 조각에 아빠가 배달을 시킬 때 쓰던 멘트를 유심히 들어두었다가 그대로 베껴서 적어두고 어느 날 점심에 10분을 연습하고 번호를 천천히 누르고 버튼을 눌러 중국집에 전화했다. 이때까지 30분이 걸렸다. 주소부터 냅다 부르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똑같이 여보세요가 들리자마자 주소를 뱉었다. 두근두근. 아직 배달 안 해요.라는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리자마자 태연한 척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곤 귀와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점심에 배달이 안 되는 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꼬맹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면서 심장이 시큰했다. 정말 소심했지만 겨우 낸 큰 용기였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내가 대견해서 칭찬해주고 싶다.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보다 어른이 되기 위해 언젠가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생각했다. 그래도 정말 잘했어.라고 도전에 대해 높이 사는 마음으로 스스로 다독이며 그때 상황을 곱씹고 가끔 이불킥도 하고 며칠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비슷했다. 누가 내게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은 문자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할 말이 있으면 늘 문자로 정리하고 다듬어서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나마도 힘들어졌던 결정적 이유는 스몰토크로 이어지는 텍스트를 더 빠르고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세상을 바꾼 카카오톡 덕분이었다. 너무 많은 말을 단시간에 쏟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인데 시류가 그랬다.
사람들은 어떻게 먼저 용건 없이 평소에 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며 지내고 만나고 별 것도 없는데 얘기할까? 귀찮지도 않나? 하는 생각과 여러 사람에게 끊임없이 오는 관심이 부러워서 실제로 이렇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직접 물었다. 귀찮지 않냐,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연락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나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한다라는 말 뿐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냥 하는 게 안되던데...
단어나 온점 반점 평소와 다른 말투 등등 말씨 하나하나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 혼자 이불을 쥐어뜯기 일쑤였고, 내가 보낸 텍스트가 다시 보이면 검열을 하게 되니까 한 번 전송 버튼을 누르곤 절대 안 들어가 보거나, 들어가기 시작하면 몇 번씩 다시 들어가서 확인하기도 했다. 전송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내가 말하는 의미가 최대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고민하고 정성스레 한답시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그것마저 기다렸을까 미안해서 오히려 못 보내기도 하고, 너무 길어서 부담스러워할까 봐 썼다 지우고, 나중엔 읽으면 답장해야 할까 봐 알림을 누르는 것조차 미루었다.
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말풍선 하나만 보내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말이다. 출처는 내 고질병인 완벽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럼에도 모든 게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완벽주의가 항상 나를 힘들게 한 시작 같다. 앞으로도 글을 쓰는 데 완벽주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거란 생각이 스친다.)
매번 에너지를 써서 쥐어짜 내는 텍스트들 덕분에 나는 재미없는 진지충이 되어버렸다. 뇌를 안 거치고 나오는 유쾌한 티키타카가 힘들었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들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남들을 보고 늘 학습했다. 그런 게 타고난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 보고 배워나갔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어떤 말이 적절한지 재미있을지와 같은 것들을 의식적으로 말이다. 이것 역시 나에겐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었다. 꼭 인간의 반응을 학습하는 로봇이 된 듯했다. 그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나는 그런 학습능력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습관은 생각을 안 거치고 나와서 힘들지 않다. 딱 그것처럼 점점 학습하고 응용하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단계에 이르자 에너지가 점점 덜 쓰여서 나중엔 배울수록 쉽게 나아질 수 있었다.
난 굳은살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굳은살이 없어서 자꾸 반들반들 만지작거리며 굳은살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깊게 파고들어서 혼자 뻗어나간 생각을 기정사실화 하다가 마음속으로 멀어져 버리곤 했다. 이걸 고치기까지 정말 많은 굳은살을 만들어 온 것 같다. 마음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애써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데에 악의가 없음을 최대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다 깨달은 결론은 간단했다. 남들은 나를 생각보다 신경 쓰지 않으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자.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지? 하지만 남들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사실 귀에 전혀 박히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남들을 너무 신경 쓰고 산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의식과잉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들의 시선을 너무나도 지독히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떤 게 진짜일까? 친구가 옷을 거꾸로 입어도,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어도 몰라보고 방귀 뀐 친구를 실컷 비웃고 집에 가선 하나도 기억 못 하던 나를 인지한 순간 저 명제에 확신이 생겼다. 남들은 그렇게 나를 신경 쓰지 않아. 드디어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수많은 눈들이 사실 뇌 없는 눈알젤리였다고 깨달은 게 이때였다.
저 눈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눈알젤리들이야라고 생각하면 이불킥 할 것들이 많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카톡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고 고심해서 보내지 말고, 다시 읽어보며 자책할 필요도 없단 것이다. 사람들은 별 것 아닌 대화에 내가 온 마음을 쓰는 것이 느껴지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긴 해도 그만큼 부담스러워서 거리를 둔다. 최대한 착하게 말하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 오히려 나를 더 옥죄고 외롭게 했다.
이걸 고치기 위해서 원칙을 세웠다. 일단 연락은 인지한 순간 바로 창을 눌러 들어가고 절대 미루지 말자고. 그랬더니 처음엔 알림 창에서 알림 하나 누르기도 어렵던 손가락에 단련이 되면서 굳은살이 생겨서 지금은 즉시 확인하고 뇌 빼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유쾌한 사람도 되었다. 그렇게 미루지 않는 습관을 하다 보니 내가 동경하던 여러 사람과 연락하는 친구는 이런 느낌이었겠거니 생각하며 바삐 사는 사람 같아서 기분도 좋아졌고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쾌감이 들었다. 또한 연락을 미루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한 가지 더 추가하게 된 것은 환경이다. 별 것 아닌데도 자꾸 잘 답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루고 싶은 연락은 양치 같은 머리가 쓰이지 않는 습관적인 행동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고 혼란시켜 몸은 바쁜 척하면서 틈새에 답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민하지 않고 쓸 말을 정할 수 있었다. 비록 의미 없는 연락이 힘들어서 회의적인 편이었지만, 내가 부러워하던 친구처럼 연락을 열심히 해보기도 했더니 이젠 어떤 연락 방식이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