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라고 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세 인물 Dali, Van, Picasso 가 있다.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본 달리의 기억의 영속은 흘러내리는 시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잠깐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초현실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무의식과 꿈에 대해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고 그림에 형상화하고자 애썼다. 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괜히 비틀린 마음이 들었다. 진짜? 그게 정설이라고 그것만 믿어야 해? 그림 속 장치 하나를 잘못 해석해서 의미가 정 반대가 되어버린 거라면? 사실 난 이렇다 할 뭣도 아니라 잘 모르면서 괜한 의심을 해본다. 예술가의 세계란 더러 심오하다고 표현하니까, 본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술관 도슨트라는 직업이 바로 이 부분에서 가장 딜레마를 겪는다고 한다. 자신의 주관이나 언론의 정설에 따라 그림을 해설해주되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하여 볼 수 있게끔 하는 것. 해설은 어찌 되었든 주관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림을 처음 감상할 이들에게 가이드라인은 되어주지만 그것이 그대로 주입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해설이 오히려 해석의 여지를 좁히는 데 일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 모순적이긴 하다.
현재 잘 알려진 예술가들 조차도 당시엔 알 수 없다고 힐난받은 경우가 많았다. 시대사조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억압당한 그림들이 새로운 시대에서 웅크렸던 날개를 펼친 경우도 많다. 지금 떠올리는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이럴 때 써도 되는 말일까? 아무튼.
예술은 무한하고 알 수 없는 것 같아서 멀게 느껴지지만 가장 가깝다. 단순하게 우리가 양말을 찾을 때 흥얼거리는 멜로디도 예술이라면 예술이다. 물론 어엿한 모양새로 선보이려면 아주 많이 가다듬어야 하겠지만.
많이들 미술 중에서도 현대미술을 보고 꿈보다 해몽이라는 뉘앙스로 워낙 비꼬기들 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예술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 하나 찍은 게 엄청난 가치와 유명세를 누리는 걸 보면서 대체 예술이란 뭘까 회의적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웬만해선 접어두기로 했다. 그들만의 세계로 두자.. 하고 체념한 느낌으로.
그런데 좀 웃기긴 하다. 점 하나 찍어도 시대상과 사회상과 그가 처했던 현실 등을 고려해 친히도 해석해주는 게 오히려 해석이라기보다 의미부여란 의미부여는 그들이 다 해서 50짜리도 100, 1000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설령 아무리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정 반대의 방향으로 해석했다면? 실은 정반대의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장치 하나를 잘못 해석해서 영 다른 의미가 되어버렸다면? 모두가 오인한 채 해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라고 계속 우려아닌 우려를 하기도 했다. 내가 원작자였어도 말도 안 되는 해석이 나오든, 정 반대로 해석하든 그냥 놔둘 것 같긴 하다. 그 속에서 가치가 더 높아지니까. (이런 걸 바이럴 마케팅이라고 하나?) 해석당하고 알려지는 것 까지도 작품의 일부니까. 보이는 만큼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게 사람이니까. 해석의 여지는 얼마든지 100퍼센트 열려있다고 봐도 된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명의 자유의지로 다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예술가들의 세계를 정 이해 못하겠단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일명 '영감'이라고 불리는 것을 하늘의 계시라도 받는 거 마냥 금세 받아 써내려 가고 물감을 흩뿌리기도 한다. 기존의 생각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많이 보일 수록 우리는 그게 바로 작품이 될만한 점지된 영적 능력을 지닌 이를 보는 것처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때 철저히 감상자 시선 위주의 환상이라는 베일을 덮어놓고 본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누군가는 그냥 일련의 과정으로 할 뿐인 것을 내 머리론 이해 못하겠어서 영감이라는 말로 퉁치고 환상 속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진짜 알쏭달쏭 신비주의 물씬 풍기는 멋진 예술가인가?
나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하면서도 예술가는 뭘까 하고 많이 고민했지만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아성찰, 즉 수련을 굉장히 많이 한 고단수이다. 그래서 그들은 숨 쉬듯 영감의 원천을 받아들인다. 영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살아 숨 쉰다. 아직 영감에 대하여 정의 내리지 못해 두루뭉술하고 사이비 같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현실만을 살아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술가들은 본인 안에서 무한히 뻗어나간다. 꾸준히 내면을 탐구하고 수련하여 갈고닦은 그 숙련도 덕에 체화된 후엔 어떤 상황에서든 수련할 수 있게 된다. 폭포를 맞으면서 목덜미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잊고 명상을 하는 스님처럼. 바깥 한복판에서까지 나와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된다. 명상을 하자. 나와 대화를 하자.
예술가는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어야만 될 수 있는 자격 같은 게 아니다. 예술은 때로는 우리의 곁에서, 때로는 내 안에서 언제나 공존한다. 꼭 예술을 하는 데 엄청난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걸 바란다면 뛰어난 재주가 어느 날 갑자기 신에게부터 이것은 너에게 하사할 한 시대를 풍미할 엄청난 재능이라고 떠벌리면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영감과 재능은 바로 쓸 수 있는 형태로 찾아오지 않는다. 땅 속에서 무가치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있던 게 원석임을 알아채고 발굴해낸 뒤에 세공 과정까지 거쳐야만이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세공하자.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삶이라는 예술을 하는 중인 것이다. 이미 나와 여러분은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