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결심하던 그날 공증 사무실에서 일하는 선배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공증 사무실에서 변호사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공증 사무실 주변이 온통 변호사 건물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는 데 있어서 정보나 도움을 얻고 싶었다. 사실, 무료로 상담해 주는 법률 사무소는 많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두려웠던 거 같다. 많은 사람이 이혼하지만 어떻게 이런 순간들을 견디고 어떻게 알아보고 대처했는지 그들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돈 관리를 남편이 하고 있었고, 비상금 따위 만드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따로 모아둔 돈도 없었다. 그래서 변호사 선임에는 얼마나 드는지, 결제는 어떻게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궁금했다. 그땐 아이들에 대한 양육권과 친권을 내가 다 가져오기 위해 하루빨리 변호사를 선임해서 유리하게 재판을 진행하고 싶었다.
지금껏 단호한 모습을 보인 적이 크게 없었던지라 이혼 소송을 준비하겠다는 말에 남편이 크게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조차 이제껏 내가 얼마나 만만한 존재였을까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이렇게까지 바로 변호사를 만나고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혼을 못 할 것 같았다.
좋든 싫든 이미 10년을 함께 지내오면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다. 다시 일을 구하고 온전히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벌어다 주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경력 단절이 된 지 오래였다. 앞으로 잘해 나갈 수 있을지 두렵고 막연했다.
하지만 나를 지키고 싶었다. 백번을 생각하고 수천 번, 수만 번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참고 살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남편이 회식을 다녀온다고 하면 온전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회유하려는 심산으로 회식도 안가겠다, 워크숍도 안가겠다, 믿음을 주겠다는 입바른 소리를 해댔지만 끝은 보나 마나 뻔했다. 사회생활 하는 사람의 회식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이며, 결국 보내놓고도 믿음이 안 가 속앓이할게 뻔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의심하고 고통받는 삶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혼을 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배우자가 외도를 해도 누군가는 참고 지낸다고 했다. 한 번쯤은 이해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실 10년을 함께 하는 동안 배려와 존중을 받으며 살았다면 ‘한 번쯤은...’하면서 용서해 줄 수도 있었겠지. 보통은 바람을 피면 오히려 와이프한테 잘해준다는데 남편은 바람필 때조차도 한심하고 정떨어지는 여자 취급을 했다.
살면서 가슴에 남겨온 상처들은 신뢰가 깨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랑을 떠나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던 그는 어느새 가장 끔찍한 존재가 되었다.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한번 더 이혼 소송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없는 재산을 분할하는 것도 그랬지만, 양육권의 경우도 내가 일자리가 없고, 소득이 없기에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새로 분양을 얻어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는 집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면 했다. 하지만 남편 이름의 회사 대출이었기에 대출을 내 이름으로 끌어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변호사와 상담이 끝날 무렵, 당장 변호사비 마저도 걱정이었던 나는 쭈뼛대며 물어야 했다.
“변호사님, 카드 할부 되나요?”
그것이 온전히 내가 날 위해 처음으로 긁은 가장 비싼 카드값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