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50
긴 추석 연휴를 보내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함께 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시간을 가끔 추억하면서.
한 달 동안 병실에서 누워 지내셨던 엄마는 추석을 기점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셨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어도 그만하면 충분한 듯 싶었다. 두 발로 일어서지는 못해도 지난 14년간 엄마의 발이 된 휠체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병원 안팎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셨다. 추석연휴에 남동생 집에 다녀온 것도 기분전환에 한몫을 한 게 분명했다. 전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하루하루 버틴 듯했지만 요새는 살짝 들뜬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감정도 유효기간이 있을 테지만 잠시라도 행복해하시니 해 드릴 것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내 마음도 덩달아 살짝 가벼워졌다. 불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더라도 더 추락하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게 사람인 것 같다. 끝이라고 포기하고 싶은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불행한 상황도 어느새 적응해 그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때론 그 마저도 소중하다는 것을.
추석을 보내고 얼마 후 여동생 생일날, 셋이 만나 죽을 먹었다. 지난 여름 내 생일에도 팥죽과 전복죽을 앞에 두고 축하를 받았다. 손수 집밥을 해 먹일 수 없으니 병원 근처 단골 죽집에서라도 당신의 눈앞에서 딸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다. 셋이 앉아 같이 먹고 이야기하니 예전으로 돌아간 듯하다며 흐뭇해하셨다. 애잔하게 눈가가 젖어드는 듯했다. 두 딸과 함께 롯데백화점에서 쇼핑하고 밥 먹던 시절을 떠올리시며 그때가 좋았다고, 그런 시간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고 아쉬움을 드러내셨다.
나이 드니 사람이 그리워. 너희들하고 같이 밥 먹고 싶고 곁에 있고 싶어. 얼마나 살진 몰라도 남은 시간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행복이란 게 뭐 별거 있어? 그게 행복이야.
헤어지기 전 엄마는 특별한 주문을 하셨다. 여동생에게 한 달에 두 번은 엄마를 보러 와 달라고. 근처에 사는 나와 달리 얼굴 보기 힘든 둘째 딸을 자주 보고 싶다고 대놓고 말씀하셨다. 미국생활 13년, 귀국 후 송도에서 2년, 이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서울에 살고 있으니 엄마 얼굴 좀 보러 오라는 뼈 있는 말씀이셨다. 나보다 독립적인 동생은 떨어져 지낸 숱한 시간들 때문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엄마에 대한 애잔함이 덜 한 듯하다. 애들 키우고 살림하는 게 바쁘더라도 마음먹기 나름인데, 가끔 나조차도 느꼈다. 동생의 마음속에 엄마의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다고. 속단할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에서 서운함이 풍기곤 했다. 동생은 흔쾌히 2주에 한 번씩 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엄마는 웃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최우선인 엄마에게 우리의 목소리와 얼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을 전해준다. 너무 잘 알지만 우리는 늘 부족한 자식일 뿐이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 해도 나이 든 부모는 자식을 기다리나 자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또한 나이를 먹어가며 그런 부모가 되는 길에 들어선 게 아닐까.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나이 들어 느끼는 허전함과 외로움과 당당히 맞설 수 있을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