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을 찾아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여 6펜스를 줍는다. 나는 후자였다. 현실이라는 인도 블록 사이에서 잔돈 줍는 데 꽤 능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부터 삶의 방향이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이런 시선 전환의 순간을 낱낱이 들춰낸다. 안정과 욕망, 도덕과 열정,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이 책을 집어 든 건 폴 고갱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삶을 살던 사람이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술에 뛰어든다는 설정 자체가 강렬했다. 예술가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달’ 같은 이상과 ‘6펜스’ 같은 현실 사이에서 사람은 어떻게 선택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는가—이 질문들이 이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추석, 흐린 하늘에 달은 볼 수 없었지만 책 속에서 나는 나만의 달을 선명히 보았다.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은 20세기 초반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본래 의사였으나 젊은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소설가와 극작가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면도날(The Razor’s Edge)』, 그리고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화려한 수사보다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을 중시했고,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건조하게 묘사했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작품은 화려한 문장보다는 이야기 자체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뒤로하고 작가의 길을 택한 그의 삶은, 『달과 6펜스』에 담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달과 6펜스』는 실제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지만, 고갱의 전기를 쓴 작품은 아니다. 몸은 ‘예술에 모든 것을 던진 인간’이라는 핵심만 뽑아내 가상의 인물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는 스트릭랜드 자신이 아니라, 그를 지켜본 사람들의 목소리와 화자의 해석을 통해 전개된다.
전기처럼 사실을 따라가는 방식 같지만, 실제로는 스트릭랜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증언과 화자의 추측으로 이야기가 엮여 있다. 독자는 그의 삶을 직접 보는 대신, 여러 사람의 시선과 조각난 이야기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를 알게 된다. 이 방식 덕분에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인물의 내면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힘이 있다. 감정을 과하게 싣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기 때문에, 스트릭랜드의 ‘순수한 광기’가 오히려 더 뚜렷하게 보인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현실의 끈을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게 끊어낸 인물이다. 런던의 평범한 증권 중개인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가족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파리로 떠났다. 미술 교육도, 주변의 지지도 없었지만 그는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인정받으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타인의 호의마저 불편해했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을 잔인할 정도로 밀어내고, 자신을 도와준 이의 아내를 파멸로 몰아넣으면서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타인은 수단도, 방해물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아마 이런 사람과 친구였다면 며칠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 속 화자는 그의 내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한시도 평안하지 않았지요.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습니다. 그게 그를 성수로운 향수(鄕愁)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마귀는 무자비했어요. 세상엔 진리를 향한 갈구가 너무 커서 그것을 얻으려고 자기가 딛고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서 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스트릭랜드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진리 대신 미를 추구했지만요.”
그는 단순히 안정된 삶을 버린 괴짜가 아니었다. 사회가 그려놓은 지도를 버리고, 자기만의 낡은 나침반을 들고 정글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의 열정에는 타협이나 위선이 들어설 틈이 없었고, 그것이 그를 냉정하고 고립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기보다, 그 기준을 깨고 자신이 믿는 예술을 끝까지 좇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문명을 등지고 타히티로 떠나 마지막 생을 보냈다. 나병에 걸려 손가락이 썩어가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마지막 유작은 오두막 벽에 그린 벽화였다. 그는 죽으며 그것을 불태워달라 당부한다. 명예나 평가가 아닌,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산 삶. 도덕적으로는 가족과 타인을 버린 실패한 인간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진심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묵직해졌다. 스트릭랜드는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좇고 있는가?” 나는 이미 6펜스를 내려놓고 달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그 길은 언제나 환하지 않다. 가끔은 고개를 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달은 위에 있다.
『달과 6펜스』는 그런 나에게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 책이다.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나를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직 나만의 달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 이 여정 속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래 곁에 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