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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Apr 28. 2024

1. 추운 나라에서 싸웠던 남국의 사나이들(上)

친독 스페인 지원군, 블루 디비전 (1941-1945)

의장 행사  준비 중인 블루 디비전의 병사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최고의 방식으로 죽는 것이다.”

- 소련군에 포위된 블루 디비전 소속 스페인 병사가 남긴 말 -




2015년 11월 5일 영국 ‘텔레그래프紙 (Telegraph)’의 폭로성 기사 하나로 인해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는 미묘한 정치적 파장이 퍼져 나갔다. 해당 기사는 메르켈 수상 휘하의 독일 연방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독일 정부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치를 위해 싸운 전직 독일군 출신들에게 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했던 것은 그 독일군 출신들의 국적이었는데 이들은 예상치 못하게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 출신이었다. 독일 정부는 1962년에 맺어진 스페인과 독일 사이의 협약에 따라 스페인 출신의 나치 독일군 복무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가 제기된 연금은 2015년 당시 기준으로 전직 군인, 미망인 및 고아들 41명에 지급되었고 해당 금액은 년간 10만 9천 유로에 달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독일 좌파당 (Die Linke) 출신의 연방하원의원인 ‘안드레이 훈코 (Andrej Hunko)’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과거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해당 성격의 연금이 지출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독일 및 유럽 정계에서도 여러 비판이 일었다. 이러한 논란이 발생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후의 스페인 사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페인 현대사에서 뺄 수 없는 한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프랑스 앙다예에서 사열 중인 히틀러와 프랑코

프랑코의 선택

1940년 10월 23일 오후 스페인에 가까운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앙다예 (Hendaye) 역 주변에는 무장을 한 수많은 독일군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더불어 화려한 장식을 한 군악대 및 의장대가 사열 준비를 하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큰 행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3시 20분에 한 대의 특별 열차가 도착했다. 전면에 ‘제3 제국’의 독수리 엠블렘이 새겨져 있던 그 열차에서 나치당 정복과 독일 군복을 입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내렸는데 그중에는 총통 히틀러와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잠시 뒤에 도착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플랫폼 앞에서 대기중이었다. 정확히 8분 뒤인 3시 28분에 또 한 대의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게 된다. 그 열차는 중립국 스페인에서 왔는데 열차가 멈추자 장식줄이 달린 스페인군 전투모를 쓴 작은 키의 한 사내가 내렸고 히틀러와 반갑게 악수했다. 히틀러처럼 콧수염을 길렀던 그는 바로 스페인 내전의 승리자이자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였다.


카펫이 깔린 열차 플랫폼에서 잠시 독일군 의장대를 사열한 일행은 곧장 히틀러의 특별 열차 안에 마련된 별도의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의 중대성을 보여주는 듯 출입 인원은 양국 최고위층의 극소수로 한정되었는데 히틀러와 프랑코 외에 양국 외무장관 및 통역 정도로 제한되었다. 지금부터 이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의 골자는 스페인이란 중립국 (정확히는 비교전국: Non-belligerent)을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 편에서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실 프랑코의 처남이자 친독파였던 외무장관 ‘세라노 수녜르 (Ramón Serrano Suñer)가 한 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했다. 그는 스페인의 참전과 관련한 사전 협의를 독일 측과 진행하였고 이 회담은 그것을 양국의 최고위층이 확인하는 자리였다.


우선 히틀러가 당시의 독일에게 유리했던 전황을 설명하며 새로운 유럽과 세계 질서에 관한 청사진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히틀러의 장광설이 끝나자 이번에는 프랑코가 스페인 입장에서 독일 측에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이 사실상 일방적인 요구사항의 나열일 뿐이었다. 프랑코는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얻고 싶어 했다. 스페인 남부에 자리 잡은 눈엣가시였던 영국령 지브롤터 (1713년에 영국이 점령)도 다시 돌려받기를 원했고 카나리아 제도의 요새화 지원도 주문했다. 더불어 당시 내전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으로 식량 사정이 나빴던 자국 상황을 들며 년 10만 톤의 밀을 요구했다. 또한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에 대한 요청도 잊지 않았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하나하나의 요구가 버거운 것이었는데 특히 프랑스 식민지 관련 사안이 그러했다. 히틀러는 군인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비록 프랑스가 항복하긴 했지만 친독 정권으로 새로 들어선 ‘비시 프랑스 (Vichy Grance)’ 정부는 엄연히 프랑스라는 나라를 공식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스페인을 참전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떼어 준다는 것은 비시 프랑스와 협력을 강구해야 하는 히틀러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회담은 두 지도자의 일방적이고 모호한 말 잔치로 치닫았고 특별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두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때 군대와 무기를 통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프랑코의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은 기회를 보며 영국의 패전이 거의 확정될 때가 되어서야 참전할 듯이 보였다. 프랑코와의 이 회담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히틀러는 훗날 무솔리니에게 “프랑코와 회담을 다시 할 바에는 차라리 생이빨을 뽑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두 정상들의 답답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외무장관 선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의제가 오고 갔다. 대서양 쪽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스페인의 산 세바스치안 (San Sebastian)에서 벌어진 별도 회의에서 이들은 상호의 의견을 절충하여 하나의 비밀 의정서 형태로 도출하고자 했다. 이 의정서에는 스페인의 참전 관련하여 추축국과 협의에 의해 그 시기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스페인군이 준비가 되었을 때’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었다. 즉, 그 시기는 총통인 프랑코가 판단할 것이었고 독일이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다. 이로써 프랑코는 ‘머리는 독일 쪽을 향하지만 발은 제자리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 묘한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다. 사실 스페인에게는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당장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었다. 당시 전쟁 상황이야 독일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스페인이 두려워하는 영국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지브롤터의 기지와 해군을 통해 지중해를 압박하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은 비록 중립국이었지만 독일 보다는 영국 편에 서 있었던 것이 확실했고 스페인 참전 시 석유 금수 조치를 한다는 비공식적인 압박을 가했다. 3년 간의 내전에서 이제 겨우 벗어난 스페인에게 또 다른 전쟁의 참여는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결정이 될 것이었다. 훗날 일부 역사가들은 이 당시 프랑코가 빈약한 스페인의 상황을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히틀러에게 과도한 요구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무리한 요구를 통해 스페인을 독일과 멀어지게 하고 참전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정답은 이미 고인이 된 프랑코 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코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앙다예의 회담은 스페인으로 하여금 독일과 거리를 두게 하였다. 한편 독일과 거리는 두었지만 머리는 그쪽으로 향해야 했던 스페인에게 몸이 조금 더 다가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엄청난 환송을 받으며 마드리드 역을 떠나는 블루 디비전 병사들

블루 디비전 (División Azul)

1941년 6월 22일에 바바롯사 작전을 통해 300만 이상의 독일군 및 추축군 군대가 소련 땅으로 진공 하기 시작한다. 독일군은 이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유럽의 십자군’으로 선전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시작된 직후 외무장관 수녜르는 한 가지 구상을 하게 된다. 다른 스페인 인사들보다 더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그는 독일을 지원하여 소련의 전장에 보내질 전투 부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스페인 입장에서 여기에는 한 가지 명분이 있었는데 소련과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가 대항했던 공화파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소련에 군대를 보내면 내전 때 도와주었던 독일에게 과거의 빚도 갚는 셈이었고 프랑코에게 커다란 적이었던 소련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파병될 군대는 스페인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 ‘개인별 자원자’에 한해 보낸다는 것이었다. 사실, 대부분 스페인 국적이란 점에서 그 구분은 대단히 모호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식 참전을 하지 않은 중립국으로서 프랑코는 이러한 애매한 조건을 내세우며 반공 자원자들을 ‘비공식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외무장관 수녜르는 6월 24일에 “러시아가 원흉이다! (Rusia es culpable!)”라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유럽의 모든 불행을 소련 탓으로 돌렸고 아물지 않은 내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많은 스페인인들에게 참전의 불을 지폈다. 6월 27일부터 본격적인 모집이 시작되었는데 군대와 팔랑헤당 (독일의 나치당과 유사한 프랑코의 극우 집권당)에서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모집 일주일 만인 7월 2일이 되자 정규 사단 규모를 훌쩍 넘는 1만 8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원자의 절반 정도가 스페인군의 장교와 하사관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의 장점은 대부분 내전 시기의 베테랑으로서 실전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 러시아 백군 출신으로 스페인에 망명해 있던 소수의 인원이 통역으로 참여하고자 했고 일부 포르투갈인들도 지원했다. 스페인 지원병들은 붉은 베레모에 ‘팔랑헤당’의 진한 청색 셔츠를 입고 출정했는데 이 셔츠의 색깔로부터 유래하여 부대 이름이 ‘블루 디비전 (División Azu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대의 지휘관으로는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했던 내전 시기의 용장이자 전략가였던, ‘아구스틴 무뇨즈 그란데스 (Agustín Muñoz Grandes, 종전 후 육군장관이 된 그는 60년대에는 스페인 부총리를 지냈고 프랑코에게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트남전 참전을 조언하기도 했다.)’ 장군이 임명되었다. 부대원들은 마드리드에서 10일간의 짧은 기초군사훈련만 받았는데 사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미 전투 경험이 있어서 훈련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더불어 부대에는 146명의 여성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간호보조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드디어 7월 13일 오후에 마드리드 북부 역에서 첫 번째 그룹의 출정식이 벌어졌다. 역에는 군악대의 연주 속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파시스트 경례를 하며 떠나는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환송했다. 이들은 스페인 북부 대서양 연안의 산 세바스치안과 프랑스의 앙다예를 거쳐 독일로 이동했는데 점령된 프랑스인들은 이들을 극도의 증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고 때로 열차에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2천6백여 명의 장교와 부사관을 포함한 1만 8천 명의 스페인 사나이들은 평균 5일 정도의 여정을 거쳐 독일 땅에 들어왔다. 독일에서의 분위기는 적대적인 프랑스와 완전히 달랐는데 서부 독일의 칼스루헤 같은 곳에서는 만여 명의 독일 시민들이 마드리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플랫폼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이후 하일브론과 뉘른베르크를 거친 일행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남부 독일 바이에른의 목가적인 마을인 그라펜뵈어 (Grafenwöhr)에 도착하게 되었다. 7월 23일까지 모든 인원들이 독일의 훈련지에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을 수용할 막사는 전형적인 바이에른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는데 쾌적하고 깨끗하게 관리되었다. 막사 주변은 넓은 숲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그 안쪽으로 다양한 훈련장이나 사격장 등이 위치했다. 스페인 지원군은 이후 독일군의 회녹색 (Feldgrau) 군복을 지급받았지만 여전히 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철모에는 독일 국방군의 흑백적 삼색 표시 대신 적황색의 스페인 국기를 딴 엠블렘이 붙어 있었다. 또한 상의 오른쪽 소매에는 ‘스페인 (ESPAÑA)’라는 국적 표시를 부착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독일식을 따랐는데 독일군의 엄격한 스파르타식 훈련 스케줄에 따라 시계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일군의 기본 병기인 마우저 Kar-98k 소총과 MG-34 기관총을 들고 독일식 분대 전술을 익혔다. 일과가 끝난 후 몇몇은 동네의 술집 등에 들러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때로는 알코올로 인한 취기 때문이었는지 근처의 독일인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다.


그럭저럭 훈련을 하며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갔는데 스페인 지원병들에게 다소 어색한 순간이 다가왔다. 모든 독일군은 훈련을 받는 동안 총통인 히틀러에게 ‘충성의 맹세’를 해야 했는데 스페인 사나이들에게 이것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7월 31일, 무더운 여름 더위 속에 충성 맹세를 위해 전 사단 병력이 집합했다. 무뇨즈 그란데스 사단장과 독일 측 대표로서 프리드리히 프롬 (Friedrich Fromm: 프롬은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발퀴레 작전’에서 박쥐 같은 행보를 보이다 나치에 의해 총살당한다) 보충군 대장이 참석해 행사를 주관했다. 최종적인 충성 맹세는 스페인 병사들의 불편했던 의중이 반영되어 원래의 독일군 내용과는 다르게 수정이 가해졌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이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 맹세를 통해 스페인 지원병들은 독일 국방군 (Wehrmacht) 소속으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공식적으로 ‘독일 육군 제250 보병사단’으로 불리게 된다. 사단은 정규 독일군 편제를 따라 3개의 보병연대와 1개의 포병연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8월 중순이 되자 스페인 병사들의 훈련도 끝나게 되었고 서서히 전장에 투입될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MG-34 기관총으로 훈련 중인 블루 디비전 병사들

머나먼 전장

스페인 병사들은 마침내 8월 20일에 그라펜뵈어 숙영지를 떠나게 되었다. 부대는 총 66개 그룹으로 이루어져 출발했는데 이동에만 일주일 이상 걸렸다. 이들은 베를린이나 라이프치히 등 눈에 익었던 독일의 도시를 떠나 점령지인 폴란드의 평원과 비스툴라 강을 지나갔다. 스페인 병사들은 점령지의 허물어진 폐허를 보며 서서히 전쟁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을 태운 열차는 최종적으로 폴란드 동부의 수바우키 (Suwałki)에서 멈추었는데 8월 28일에 부대의 마지막 그룹이 도착하면서 1단계 이동이 완료되었다. 이후 부대는 열차가 아닌 행군을 통해 본격적인 이동을 이어 갔는데 최종 목적지는 모스크바로 가는 관문이었던 스몰렌스크 (Smolensk)였다. 스페인 병사들은 이곳에서 ‘페도어 폰 보크 (Fedor Von Bock)’ 장군 휘하의 중부집단군에 배속되어 모스크바 공격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스페인 병사들은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며칠 간의 마지막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으로 소련 땅에 들어섰는데 광활한 숲과 끝도 없이 펼쳐진 비포장 도로 및 음산한 소택지가 남국의 사나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은 이동 수단의 도움도 크게 받지 못했고 각종 무기와 보급품을 휴대한 체 수백 킬로미터를 터벅터벅 걸어서 이동해야만 했다. 많은 병사들이 행군 과정에서 힘들어했고 발과 어깨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내들은 열렬한 반공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부대였고 ‘공산주의의 심장’인 모스크바에 일격을 가한다는 상상만으로 높은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전선의 상황은 이들의 남은 여정이 희망대로 흘러가도록 두지 않았다.


스페인 병사들은 악전고투 속에 근 한 달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소련 땅에서 행군했고 천천히 스몰렌스크로 이동해 갔다. 그러던 중 9월 24일에 레닌그라드 방향으로 공격하던 북부집단군 소속 ‘빌헬름 폰 레프 (Wilhelm Von Leeb)’ 장군이 증원을 요청했다. 당시 독일군의 주공은 중부집단군으로 집중되어 수도인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병력이 부족해진 북부집단군이 더 많은 병력 보충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독일군 총사령부는 몇 개의 사단을 빼서 북부집단군에 배속시켰는데 이중에는 아직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제250 보병사단’도 포함되었다. 스페인 병사들은 갑자기 행군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향해야만 했다. 전시에 떨어진 명령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무뇨즈 그란데스 장군을 비롯한 거의 모든 병사들이 모스크바로 가지 못한 것에 심한 불만을 터뜨렸고 부대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독일 16군 소속으로서 유서 깊은 러시아의 도시 노브고로드 (Novgorod)에 배치되었다. 이때가 대략 10월 초순이었는데 독일의 숙영지를 떠난 지 거의 50일이 다 된 시점이었다. 병사들은 오랜 이동과 가을장마 속의 진흙 밭 행군으로 인해 극도로 지쳤지만 한편으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였고 지금부터 스페인의 병사로서 독일인들에게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들에게 진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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