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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11. 2024

2024년 5월 9일 모스크바에는 눈이 내린다

대독 승전기념일 행사를 보고

붉은 광장에서 행진 중인 러시아 병사들

매년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는 국가적인 규모의 거대한 행사가 열린다. 바로 1945년 5월 9일 베를린에서 베어마흐트 (Wehrmacht: 나치 독일군)의 최고 수뇌인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에게 항복하며 전쟁이 끝났던 것을 기념하는 ‘전승기념행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사실 연합군에게는 전날인 5월 8일 프랑스 랭스에서 독일군의 ‘알프레드 요들’ 장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이 주인공이 되는 항복조인식을 원했고 다음 날인 5월 9일에 베를린에서 ‘장군’보다 격이 높은 ‘원수’를 데리고 다시 조인식을 실시한다. 이렇게 해서 서방과 소련/러시아는 매년 하루 차이를 두고 대독 승전을 따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승전 행사는 전쟁이 끝난 후 한 달이 지난 1945년 6월 24일에 실시되었다. 이때 단상에는 스탈린이 서 있었고 행사장에는 백마를 탄 기병 출신의 주코프가 승리의 주역으로서 행사를 주관했다. 말을 못 타는 시샘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주코프가 상당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행사 중에는 모든 나치의 군기를 모아서 태워 버리는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독일군들이 보았다면 이보다 더한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소련 시절 동안 승전 기념행사는 1965년과 1985년 등 주요 연도나 10월 혁명기념일에 함께 실시했는데 소련이 해체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이후로는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1995년에 대독 전 승리 50주년을 맞이하여 행사가 재게 되었는데 이때는 처음으로 소련이 아닌 러시아라는 국가가 행사의 주체로서 등장하였다. 이후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연기된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5월 9일에 붉은 광장에서는 승전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행사는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쿠이비셰프, 아스트라한, 첼랴빈스크 등 러시아 전역에서 시차를 두고 실시된다.


2024년 행사는 오전 10시에 의장/군악대의 입장과 함께 비장한 분위기의 곡인 ‘신성한 전쟁 (Sacred war)’으로 시작되는데 이 곡은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직후 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잠시 후 국방장관 쇼이구가 탄 리무진이 광장을 사열하며 부대별 행사 준비를 점검하면 도열한 군인들은 특유의 ‘우라 (만세)’ 연창으로 화답한다. 곧이어 최근 5번째 임기에 들어서며 ‘차르에 등극한’ 푸틴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5월답지 않게 모스크바에 눈과 진눈깨비가 날렸는데 모두 외투와 파카를 입고 앉아 있었다. 15년 전 겨울에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방문했을 때 영하 23도를 기록했는데 TV 화면으로만 봐도 그때의 혹독한 추위가 이입되는 듯했다. 이어서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고 유명한 드럼 선발대의 행진에 이어 본격적인 러시아 육해공군 입장이 시작된다. 첫 번째 곡인 ‘수도 행진곡 (Capital March)’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병과 별 부대들이 지나갈 때마다 ‘공군 행진곡’ (Air March), ‘포병 행진곡 (March of artillerymen)’ 등 붉은 군대 합창단의 여러 레퍼토리 등이 연주된다. 특히, 공군 행진곡은 러시아 노래 답지 않게 밝고 신나는 분위기다. 다음으로 해군이 행진했는데 올해는 내가 선호하는 해군가인 ‘우리는 한 가족 (The crew is one family)’이 제외 되었다.(난 이 노래의 전개가 좋다.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롤러코스터 타는 느낌)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러시아적인 정서를 담고 다고 생각하는 군가 ‘전진! (On the road)’도 나온다. 여군들이 행진할 때 연주되는 곡은 '카츄샤 (Katyusha)'이다.


병사들의 사열이 끝나면 행사의 2부로서 기갑 차량과 장비들이 나오는데 T34/85형 전차 (6.25 때 북한군이 사용했던 우리에게는 뼈아픈 무기이다.) 한 대가 등장하며 화려한 분위기의 ‘승자의 환희 (Triumph of Winners)’가 연주된다. 지금은 전시라 다른 많은 무기들은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고 마무리 행사로서 공군 곡예비행단인 ‘러시아 기사단’ 전투기들이 등장하며 러시아 국기색의 연기를 뿌리는데 이때 다시 한번 공군 행진곡이 나온다. 행사의 막바지에 단상의 요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 지극히 서정적인 멜로디의 ‘슬라브 여인의 이별 (Farewell of Slavianka)’이 연주되는 가운데 모든 행사가 마무리된다. 이 노래는 1941년 11월의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붉은 광장 행진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전쟁터로 나가며 연인과 헤어지는 모든 슬라브인들의 감정을 대변한다.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실시했던 승전기념일 행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지만 또 하나의 전쟁인 우크라이나와의 대결은 아직도 3년째 계속되고 있다. 단상에서 때때로 옆 자리의 2차 대전 노병들과 대화하며 사열을 응시하던 푸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https://www.youtube.com/live/0JhHEuqEIJE?si=tM_etzxKSVsRz_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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