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오른쪽에 작은 흉터가 하나 있다. 검지 두 마디쯤 되는 크기. 어릴 땐 살찐 돈벌레처럼 보여 유난히 싫었지만, 지금은 그 흉터 안에 어린 날의 가장 따뜻한 장면 하나가 고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
열 살 때였다. 학교에 가려는데 배가 조금 불편했다. 배 아픈 것 정도야. 엄마도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처럼 등교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배가 더 아팠다. 쿡쿡 쑤시기도 하고 사정없이 조여 와서 허리를 펼 수조차 없었다. 참다 참다 양팔로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놀란 선생님이 뛰어왔고 친구들도 웅성대며 내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엄마가 보였다. 주변이 분주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오더니 내 오른쪽 팔에 노란 고무줄을 탱탱하게 묶었다. 피를 뽑았다.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의 채혈은 왜 그렇게 아프던지.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이 급성 맹장염이라고 했고 다음 날 아침에 수술하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떼굴떼굴 구르다 쓰러졌는데, 집으로 갈 땐 언제 아팠냐는 듯 걸어 나왔다.
다음날,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했다. 11월의 병원 복도는 시리도록 추웠고 진녹색 담요를 덮었는데도 몸이 달달 떨렸다. 무서웠다. 복도를 지나 수술실 문이 열렸다. 마취할 때까지 엄마, 아빠 없이 홀로 누워있던 수술실의 냉기를 잊지 못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추위가 느껴졌다. 배도 당겼다. 비몽사몽. 나는 또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아득하게 멀었지만 또렷하게 느껴지는 공간의 분주함, 엄마인 것도 같고 아빠인 것도 같은 얼굴. 그리고 사람들. 아, 수술이 끝났구나. 마음이 놓이자 눈물이 터졌다.
병원에 일주일 정도 입원했다. 병실은 1인 실이었고 특이하게 온돌방이었다. 웃풍 돌던 집보다 따뜻해서 병원에 있는 것이 나름 좋았다. 병실 안은 매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엄마, 아빠의 친구들. 이모, 삼촌, 할머니.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 알든 모르든 누구든 나를 보러 오는 것이 좋았다. 평소 먹지 못했던 음식들이 선물로 들어왔다. 과일바구니와 종합 과자 선물 세트가 쌓여갔다. 매일 신났다.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받은 날은 너무 좋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누가 먼저 먹을까 봐 자다가도 일어나서 뚜껑을 확인했다. 방귀 나오면 먹을 수 있지요? 묻고 또 물으며 후르츠 칵테일 퍼먹을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돈벌레 같은 흉터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따뜻했던 장면은 후르츠 칵테일도 종합 과자 선물 세트도 아니었다. 반 친구들의 병문안이었다. 반 친구들 모두가 반반씩 나눠 이틀에 걸쳐 와 주었다. 문을 열어 놓고 선생님과 엄마 아빠, 몇몇 친구들은 복도에 서 있어야 할 정도로 좁은 방이 꽉 찼다. 바글바글 모여 있던 열 살 친구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많이 아프냐고 묻는 친구, 쑥스러운지 아이들 틈에 숨은 친구, 옆구리 쿡쿡 찌르며 서로 킥킥대던 친구. 그러다 서로가 웃음이 터졌는데 배에 실밥을 풀지 않은 상태라 웃다가 실밥이 터질 뻔했다. 말하지 마. 웃기지 마. 배 터질 것 같아. 까르르. 교실 바닥을 뒹굴던 며칠 전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밀어 넣었다. 한 번 터진 열 살 아이들의 웃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방 안이 온통 웃음이었다.
어른이 되자 흉터도 점점 흐릿해졌다. 그제야 한 사람이 선명해졌다. 친구들을 데리고 이틀간 병문안 왔던 담임선생님이다. 왜 그 따뜻한 뒷모습이 지금에서야 떠오르는 걸까. 바글바글 모여있던 친구들 뒤로 흐뭇하게 웃고 계셨을 선생님. 학교에서 병원까지 오는 길을 떠올려봤다.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반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는 일은 또 어떻고. 차비는 어떻게 했을까. 병원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과 다음 날의 병문안까지. 반 아이들을 챙기며 고군분투했을 선생님을 너무 늦게 떠올렸다. 선생님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지금에서야 선생님이 생각났다.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갑자기 네가 쓰러져서 얼마나 놀란 줄 아니. 병문안 가던 날은 얼마나 추웠다고. 말썽꾸러기 녀석들 데리고 버스 타느라고 정말 힘들었단다. 이런 얘기라도 좋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웃으며 선생님을 껴안을 텐데.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날의 선생님, 그날의 내가 서로의 기억 어딘가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