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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Nov 30. 2022

이혼 후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

 유달리 일이 늦게 끝난 어느 저녁, 현관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자러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진작 저녁산책을 마쳤어야 했을 밤 11시였다. 짧은 고민 끝에 산책줄을 잡고 바깥으로 나섰다. 차가운 밤의 냄새가 쏟아지는 졸음을 물리쳐주었다. 밤 산책에 신이 난 강아지는 꼬리를 휙휙 내젓고는 앞장서 걸었다. 고요한 주택가를 한참 걷고 있는데, 돌아선 한 골목에서 낯선 개를 마주쳤다. 개 주인에게 다가가도 되냐고 물은 후 천천히 인사를 시켰다. 내 강아지의 두 배 정도 크기의 허스키는 굉장히 순했고, 개들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근처에 사시나봐요.”


 “바로 이 뒷집 살아요.”


 개들끼리 친해진 덕분에, 나는 갑작스레 새로운 동네 친구를 한 명 얻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미국인으로, 우리는 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잠깐 대화를 나누며 서 있다가 골목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매너 좋은 두 강아지들 덕분에 우리는 수다 삼매경에 빠져 깔깔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밤공기가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나는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술술 꺼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럼, 다음에 그 애견 운동장에 같이 갑시다. 내 차 타고요.”


 “고마워요, 안 그래도 멀어서 차 렌트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미국에 두고 왔다는 차가 그립겠어요.”


 “당연하죠. 나는 지금 렌트카 회사의 vip랍니다.”


 별 거 아닌 이야기도 유달리 재미나게 느껴졌다. 휴대폰으로 달력 어플을 켜서 만날 날짜를 적어두고, ‘강아지 운동장’이라 메모했다. 그러다 문득 그 날짜 아래에 적힌 ‘승오 축구’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앗... 이번주 토요일은 안 되겠어요. 일요일로 날짜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네. 나는 괜찮아요.”


 “아참, 그 날 제 아들을 데려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아들이 있었어요?”


 “네. 올해로 여덟 살 되었답니다. 단발 정도로 머리가 긴 아들이에요.”


 휴대폰의 달력 어플속 일요일에다 ‘강아지 운동장’이라 적고 있는데, 오늘 처음 사귄 친구가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일요일에 남편도 같이 가나요?”


 “아...남편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던 것 같다. 남편은 없어진지 꽤 오래 되었는데요, 남편 대신 남친은 있고요, 애가 무지 잘 따르는 그런 남친이에요, 엄청 착한 애거든요, 사실 남편과의 결혼생활보다 남친이랑 연애한 시간이 더 길고요, 등등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정신없이 나열되고 엉켰다.


 그런 나를 보고 오해했는지, 상대가 조심스레 말했다.


 “남편도 같이 가도 괜찮아요. 편하신 대로 해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안 가도 괜찮고요.”


 “아니, 그게.”


 방금 막 만난 사람에게 가족사를 다 까발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겠지만, 약간이라도 놀라거나 궁금해하는 표정이 보이면 내가 더 당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좀 사정이 있어서요.”


 이 사람과의 인연이 어느 정도로 오래 갈지 알 수 없다. 오늘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동네 주민이라서 자주 만나 친해질지도 모른다. 예상하지 못한 단점들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니까 자연스레 멀어질지도 모른다. 개들끼리 금세 친구가 된 것처럼 어쩌면 견주끼리 베스트 프렌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모르는 것들 천지라서 결정이 더욱 어려웠다. 요즘은 이혼했다고 무시하는 분위기는 아니라지만, 지금 같은 좋은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겁나기도 했다.


 “...사실 제가 이혼했거든요.”


 뒤엉킨 실타래를 간신히 풀어내어 한마디를 던졌다. 왜 이혼했냐고 물으면 어쩌지? 초면에 가정폭력이 어쩌고 하는 얘길 꺼내긴 싫은데.


 “아... 그래요. 그러면 남편은 오지 않는걸로...”


 “남편은 없는데 남친은 있거든요. 걔도 같이 가도 될까요?”


 “예에?!”


 ...저질렀다. 저질러버렸어.


 결국 이혼했다는 사실과, 연애중이라는 사실 모두를 얘기하고 말았다. 상대는 말하던 자세 그대로 멈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변명의 필요성이 느껴졌지만 부러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랑 바람나서 이혼한 여자’로 나를 판단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가슴속에서 요동쳤지만 ‘당당하게 살기로 했잖아!’라는 생각으로 눌러버렸다. 그래, 어떡할거야... 내가 이혼했고 연애중이라는데, 남들이 무슨 자격으로 뭐라 하겠어. 이런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돼.


 다행히 그녀는 잠깐 놀란 이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럼 일요일에, 그쪽 아들이랑, 그쪽 남친이랑 다 같이 만나요.”


 “개들도요.”


 “물론, 그게 제일 중요하죠. 우리 개들이 그 날 신나게 뛰어놀면 좋겠네요.”


 “하하, 너무 기대되네요!”


 새카만 밤하늘 아래서 우리는 활짝 웃었다. 또 만날 걸 아는지 강아지들도 꼬리를 흔들며 즐거워했다.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개는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숨기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일단 말 해놓고 고민하는 쪽이 더 나았다. 워낙 성격이 급한 나라서, 아마 비밀을 만들어두면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 근질거릴 것이었다.


 시린 밤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고는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넘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수면부족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기상하게 될 것이었다. 짜증내며 아들의 아침 식사를 챙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학원에서 일하기에 오후에 출근하여 늦은 밤까지 일한다고 했다. 그러니 보통은 밤 11시부터 밤 12시까지 개 산책을 시킨다고. 나의 생활패턴과는 무척 다른 시간대였다. 내일 아침을 떠올리니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왔다.


 “전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졸려서요.”


 “그러세요. 전 조금 더 걷다가 들어갈게요.”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내 남친이나 전남편에 대해 일언반구 묻지 않았다. 그런 배려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뭐랄까, 비밀로 하고 싶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기엔 좀 고민되는...


 고요한 밤의 골목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은 서로의 부모님이나 형제에 관한 이슈를 초면에 나누지는 않는다.  알고 지낸 지 2~3년 된 친구가 '실은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라고 한다면 '그렇구나'라고 하지 '어떻게 그런걸 속일수가 있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친구 본인의 이혼은 어떠한가. 알고 지낸 지 2~3년 된 친구가 '실은 나 이혼했고 혼자 아이 키우고 있어. 근데 남자친구도 있어.'라고 한다면? 그때도 '그렇구나'로 끝날 수 있을까.


 초면에 가정사를 탈탈 털어 공유하고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속인 채 친구로 지내고 싶지도 않다. 어느 선까지 공개해야 무난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혼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것들 천지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을 때는 특별히 더 혼란스럽다. 이혼이라는 이유로 위축되어 살고싶지 않은데... 새로운 만남앞에서 절로 소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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