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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Jan 31. 2023

아들이 만난 산타는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생각의 끄트머리가 어느 하루 멈춘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다섯 살의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나는 엄마가 귓가에 속살거리는 말에 두근거리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실 거야. 내일은 크리스마스잖니. 어떤 선물이 받고 싶어?”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엄마가 지친 목소리를 감추고 물었다. 오래되어 드문드문 색 바랜 티셔츠엔 알록달록한 돛단배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처럼 새하얗게 갈라져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늦게 귀가한 엄마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또 설거지를 하고 집안을 정돈해야 했다. 철없이 어지르기만 하는 연년생 남동생을 있는 힘껏 째려본 뒤, 나는 말없이 엄마를 도왔다. 동생을 챙겨 어린이집에 가고, 또 동생을 챙겨 둘이서 집으로 가고, 엄마가 오면 집안일을 돕고, 타지에 사는 아빠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그 무렵 나의 일상이었다.

다섯 살이었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부모에게 대단한 선물을 사 줄 만한 능력이 없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잖아’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 말도 잘 듣고, 착한 어린이니까, 동생도 잘 보살피고 사고도 치지 않으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로 있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내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그 시절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다섯 살의 나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무척 갖고 싶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에, 어린이집을 왔다 갔다 하며 길거리에서 본 크리스마스트리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반짝이는 ‘예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나는 트...”

말을 꺼내다 말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트리는 많이 비쌀까? 너무 비싼 걸 갖고 싶다고 소원을 비는 바람에 산타가 화가 나서 아무것도 안 주면 어쩌지? 산타가 엄마에게 화를 내면? 엄마가 산타에게 돈을 주고 선물을 사 오는 걸까?

“음... 트리에 있는... 반짝반짝한 장식이 갖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트리가 갖고 싶어!’라고 외쳤지만, 그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소원이었다. 한 편으론 ‘정말 산타가 있다면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트리를 선물로 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엄마는 그걸로 되겠어? 라며 의아한 눈을 했지만, 나는 들뜬 아이처럼 연기하며 진짜로 갖고 싶어!라고 소리쳤다. 자꾸 말하다 보니 정말 갖고 싶은 것도 같았다. 어차피 집이 좁아서 트리 같은 건 둘 데도 없는걸. 나는 그저 장식이면 충분해.

그리고 그날 밤. 잠귀가 밝았던 나는 잠든 내 얼굴을 확인하고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는 엄마의 모습을 실눈으로 확인했다. 엄마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확인해 보니 머리맡엔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트리 장식품이 들어있었다.

‘역시 산타는 없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기다렸지만 내 속마음을 눈치챈 산타가 트리를 보내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며 쓸모없는 장식품을 몸에 둘둘 감고 거실을 뛰어다니며 소리 질렀다. 퀭한 눈으로 나를 좇던 엄마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라도 피어나길 바라면서.

그런 나와는 다르게, 남자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산타의 존재를 믿었다고 한다. 천성이 둔한 탓도 있겠지만, 부모의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도 내 아들을 위해 노력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몰래 알아내 준비하고,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산타 옷을 입은 남자친구가 짠하고 나타나 선물을 주고 가는 이벤트를 기획한 거였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이는 합체 로봇 세트를 원했다. 이벤트는 성공적이었다. 잠든 척 연기를 하고 있던 나는 아이가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왔어!’라고 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거짓말처럼 산타는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승오가 뭔가 잘못 본 거 아닐까?”

“아아니야아아... 엄마, 진짜 산타가 여기 와서 선물을 주고 갔다니까!”

“우와 정말 선물이 있네. 하지만 정말 산타였을까?”

“산타 맞다구우우!”

“하하하, 그래, 그래. 선물 열어보자.”

내가 믿어주지 않아 부루퉁해진 아들의 얼굴에 다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이에게 이벤트를 해주며 어린 날의 나를 위로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쁘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될, 뿌듯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이 덮쳤다. 그리고 다음 해, 여섯 살이 된 아들은 코딩 학습 세트를 원했고, 역시나 잠든 척하는 나에게 ‘엄마! 산타가 또 왔어!’라며 아들이 달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진짜 제대로 봤다구! 진짜 산타야 엄마! 이것 봐! 선물도 있잖아!”

잔뜩 흥분한 아들은 큰 소리로 떠들며 다급히 포장지를 뜯었다. 그리고 코딩 학습 세트를 발견하자 기쁨의 춤까지 추었다.

“엄마는 못 봤는데... 정말 산타가 맞아?”

“진짜라니까, 엄마는 왜 자꾸 자는 거야!”

알쏭달쏭한 얼굴을 연기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어쨌든 아이는 행복해했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행복했고, 남자친구도 즐거워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자 눈치가 여간 빨라진 게 아니라서 이번엔 산타 이벤트를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자고 일어난 아이의 머리맡에 그토록 원하던 거대 호랑이 인형이 놓여있었고, 아이는 또다시 요상한 몸동작으로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여덟 살이 된 아들의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어떻게 할까’로 남자친구와 한참 토론했다. ‘엄마가 산타 할아버지를 돈 주고 고용한 거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아들에게 드디어 산타의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점심을 먹고 상을 치우는데 딩동-벨소리가 울렸다. 은은하게 미소 짓는 나를 뒤로 하고 아들이 후다닥 뛰어나가 산타를 만났다. 나는 당연히 아이가 삼촌을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제 편지에요. 다음에는 제가 선물을 드릴게요.”

약간의 감동이 밀려오고, 이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남자친구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낯선(?)남자 품에 안겨서인지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던 아이는 나와 산타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한 눈빛을 했다. 한참 큭큭대며 웃던 남자친구는 아이에게 선물을 전달했고, 이어서 모자와 수염을 벗어던졌다.

“승오야, 메리 크리스마스!”

“아, 뭐야. 삼촌이었어?!”

깜짝 놀란 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삼촌인 줄 몰랐어! 나 너무 충격이야!”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승오였지만, 산타가 제3의 인물이라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간의 이벤트를 위한 노력을 설명하면서, 엄마와 삼촌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했다.

"신비의 존재가 계속 있는 편이 나았을까?"

"아냐, 그래도 난 삼촌이어서 더 좋아!"

산타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아이를 속이는듯한 기분에 서둘러 사실을 밝혔지만, 화등잔만 해진 아이의 눈동자를 보니 조금 더 숨기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었다. 감상에 젖어있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커다란 박스를 하나 내밀었다.

"온수매트야. 너 방이 좀 추운 거 같아서..."

예상치 못한 선물에 깜짝 놀랐다가, 이윽고 행복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도 산타는 여전히 기분좋은 존재인 걸 보면, 산타의 유효기간은 꽤 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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