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졸업하니 여유가 생겼고 그러다 보니 한동안 뜸했던 어릴 적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기 시작했다. 화창한 날 시내에 모여 전시회도 가고 맛집도 찾아다니며 한량없이 놀며 지낸다. 수다는 우리의 특허. 이런저런 화제가 끊임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결혼 안 한 자녀 걱정에 대한 주제가 뒤로 밀려나나 싶더니 화제가 바뀌었다. 이후 우리를 지배하는 이야기는 단연 부모님이다. 우연히도 나를 포함해 5명 모두 홀로 된 어머니를 곁에 두고 있다. 자녀가 결혼을 하든 말든, 아이를 낳든 말든 더 이상 우리의 과제가 아님은 다들 인정한다. 속이야 어떠하든 다들 기세 좋게 내뱉는다. 니 인생 니 맘대로 살아라. 그러나 최고의 주제로 등극한 어머니 돌봄에 대한 주제는 우리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걱정, 한숨, 답답함, 죄스러움.
환갑이 넘은 딸들은 바쁘다. 일, 이주일에 한 번꼴로 반찬을 해 나르고 병원을 모시고 다니고 필요한 생필품을 주문해 드린다. 사이사이 전화로 통증의 상태를 살핀다. 그 많던 아들들은 다 무엇을 하는지 조용하다. 아들들한테는 아픈 기색 없이 괜찮다를 연발하는 모친들은 딸들한테는 아픔을, 약함을 하소연한다. 삶의 과제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시기에 우리 딸들은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하는 6,7십대에 부모 돌봄에 발이 묶인 젊은 노인들. 부모를 보내드릴 때이면 이미 늙은 노인으로 접어든다. 노인이 노인을 모시는 시대다.
친구들 중 열에 두세 명은 일찍이 부모를 보내드린 경우다.
"너는 좋겠다. 그래도 긴 병 없이 가셨잖아. 우린 멀었다. 요즘 장례식장에 가면 대부분 90살이 넘으신 분들이야 " 죄스러운 마음에 목소리를 한껏 낮춰가며 소곤댄다.
우리의 공통점은 어머니를 만나고 오면 에너지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을 준비해 가고 먼 곳을 다녀오는데 따른 육체적인 수고로움 때문은 아니다. 어머니를 대하면 즐거움과 푸근한 감정보다는 짜증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만날 때마다 기력과 기억을 잃어가고 했던 말을 무한 반복하신다. 어눌한 몸놀림과 총기를 잃은 희미한 눈동자,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과 생활방식. 답답한 마음에 늙으신 모친에게 버럭 잔소리를 하고 돌아 나올 때는 마음이 우울하고 편치 않다.
준비 없이 오랫동안 생존해 계시는 부모가 겪는 쇠퇴는 삶의 순리이건만 내가 왜 화가 나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마주친 노인들에게는 부러 다가가 도움을 베푸는 내가 정작 내 부모에게는 친절하지 않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은 부모님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면에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이 원인이다. 현재 부모의 모습은 바로 나 자신의 미래다. 아무리 총기 있고 잰걸음으로 생활했어도 80이 넘을 즈음이면 영락 없이 쇠퇴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본다. 이것이 정해진 미래라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건강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우리 세대는 건강 정보에도 민감하고 돈을 바칠 여력도 있다. 그러기에 노년을 맞이하는 준비에 적극적이다. 노력에 따라 가속노화와 감속노화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건강한 식사습관을 실행하고 건강보조 식품도 사 먹는다. 실제로 나이에 상관없이 젊은 노년을 길게 유지하는 벤치마킹 사례도 있다. 김형석 교수와 가천대 이길녀총장은 비범한 사례이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는 이 또한 넘사벽이다.
급속도로 다가오는 장수의 가능성이 다시 한번 목을 죄어온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과 쇠퇴는 시나브로 진행되어 가고, 혹여 숨어있던 각자의 약한 고리가 몸 어딘가를 뚫고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부터는 병과의 긴 동행이 시작된다. 이 길로 한번 접어들면 다시 돌아 나오기는 어렵다. 모든 기능이 차근차근 약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계속해서 늘어간다. 급기야는 내가 내 몸을 다루지 못할 정도로 침대에 누워있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생각만 해도 공포스럽다. 지금 구순을 맞는 우리네 부모의 모습이다.
탄생에는 사람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죽음도 그래야 할까? 여기서 생명의 존엄과 결정권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담론을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 생명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마땅하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며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자기 결정권'과 '조력사'가 본격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시작하여 스위스등 유럽 몇몇 국가와 미국의 특정주에서는 존엄사를 허용한다. 그러나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이런 '존엄사'는 일부에게만 적용될 뿐 앞으로 급격히 늘어날 수많은 노화와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뭔가 사회적인 새로운 생각, 합의가 필요할 때다.
어떠한 삶이든 무의미한 삶은 없다. 하지만 이만큼 살았으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 육체와 정신의 고통과 무력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때 스스로 죽음의 결정권을 가지면 좋겠다. 요양병원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의식을 붙잡고 기저귀를 차고 온종일 누워있는 노인들을 대할 때 이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며칠 전 호주의 필립 니치키박사가 개발한 죽음캡슐 기사를 보았다. 캡슐 속의 산소농도를 떨어뜨리고 질소를 투입하여 기분 좋은 상태로 5분 이내에 사망하게 되는 존엄사 기계이다. 가격도 2,3만 원대란다. 몇 년 전 모금으로 마련한 돈으로 조력자살을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간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의 경우보다 비교도 안될 정도의 착한 가격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죽는다는 게 특별히 슬픈 일은 아니다.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라며 노인들이 조력자살권을 포함한 완전한 형태의 시민권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며칠 전은 대만의 한 의사가 20여 년간 병상에 누워있으며 딸인 자신에게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달라"라고 부탁하는 어머니를 단식존엄사로 보내드렸다는 기사를 보았다. 병원의 영양분 투입을 멈춘 어머니는 곡기를 끊은 지 21일 만에 편안한 얼굴로 생을 마감했다. 마치 동물들이 죽음의 때가 되면 조용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곡기를 접고 죽어가는 원초적인 방식과 유사하다. 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자연법칙이 아닐까? 그 과정을 책으로 쓴 그 의사는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며 고령화시대의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한동안 우리 마음을 지배했던 워라밸, 웰빙만큼이나 웰다잉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가 왔다. 잘 죽고 싶은 욕구, 삶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깨끗하게 죽고 싶은 욕구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가 아닐까? 이 욕구 또한 호주의 구달교수가 말한 보호되어야 할 시민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