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폐를 절대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남에게 근거없는 호의도 베풀지 않는다.
엄마의 삶을 나름의 기억대로 쭈욱 흩어보니 내가 정리한 엄마의 신념이다.
마음과 정을 주고 받기보다는 안주고 안받는,
그래서 빛진 개념이 없는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랄까?
그래서 엄마에겐 친한 친구가 드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친구들은 이미 저세상을
떠나셨다.
언젠가 엄마는 나의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딸들에게 너무 해준것이 없어서 손주들을 돌봐주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엄마는 나의 딸을 백일부터 대학까지 돌보았다.
매일 우리집에 출근하여 집안 살림을 하고 아이를 먹이고 학원을 보내고
재래시장과 마트를 돌면서 10원이라도 싼 물건을 사고
무거운 찬거리를 날랐다.
나의 경제사정이 조금 좋아진 후부터는 청소도우미를 붙여주었고
그 아주머니와 사이좋게 일하고 점심해 먹으면서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저녁을 준비한 후, 내가 퇴근하면 그제서야 집으로 향했다.
월요일 부터 금요일까지 17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주중을 보낸 후 토요일 하루를 쉬고,
또는 우리의 주말외식과 나들이에 동반한 후
일요일 아침 일찍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먼거리를 나섰다.
전업주부인 언니의 집으로 가서
어린 조카를 돌보고 언니가 교회를 간 사이에
일주일의 빨래와 청소, 냉장고 정리를 싹 해놓고 늦게야 다시 먼길을 되돌아 오곤했다.
이 또한 10년이 넘게 변함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덥거나 춥거나 어떤 생색도 내지 않고 묵묵히 일요일 루틴을 수행했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젊은날 정작 직업전선에 나서야하는 상황에서는 꿈쩍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엄마의 그 한결같은 딸들에 대한 도움은 지난날 빚을 갚는 나름의 신념이었을까?
자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표현이 건조하고
부모로서의 지극한 정상과 희생과는 거리가 먼 개인주의 표상의 엄마를 뒤늦게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녀의 말처럼 딸들에게 미안함을 품고 있기에, 젊은날에는 두려움으로 세상밖에 나가지 못했기에 할 수있는 일이 없었지만 손주들 돌봄은 안전하고 보람있는 영역이라 마다않고 최선을 다한것일까?
언젠가 엄마가 내비친 말이 떠오는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냉정함으로 자식들을 사랑해주지 못해서, 방치했기에 손주만큼은 못다한 사랑과 돌봄을 하고 싶다고.
엄마는 지금 노인임대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
혼자 산지 이제 20여년이 된다.
손주육아와 살림도우미를 끝낸 후 홀로 지내며 본인 말에 의하면 참 잘 살고 있다.
비록 각종 성인병으로 인해 약을 한다발씩 먹으며
40년 넘게 괴롭히는 극심한 안면통증과 함께 살지만
매일 경로당에 출근하여 맛난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담소를 나누며
병원여행을 하고 아직도 저렴한 찬거리를 찾으러 다니며
몇년전부터 한 몸이 된 노인용 보조기을 끌며
동네를 빙빙 돌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방문도 반가워하지 않고
자녀들이 머무는 시간도 불편해하며 어서 가라며 재촉한다.
심지어 수년만에 근처를 방문하며 겸사겸사 찾아온 당신의 형제의 방문도 거절하고
나름의 생활에 혹여라도 있을 방해요인을 차단한다.
코로나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때 얼른 신청한 요양등급.
수소문해서 소개받은 요양보호사와 면담하고 계약을 맺을때
나의 간곡한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가서비스를 받겠다고 동의한 이후에도
엄마는 당신이 몰래, 기어이 서비스를 취소했다.
불편하다고, 아직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래.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다.
엄마의 소원은
이렇게 살다가 갑자기 심장이 멈추고 혼자서 조용히 가는 것이다.
당신이 죽은 후 형제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화장장이 예약되는대로 다음날이라도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사후 처리해야 할 것들, 정리해야 할 것들을 생각날 때 마다
수시로 이야기한다.
엄마는 진심이다.
아무의 도움도 원치않고 이렇게 살다 어느날 가고 싶은것.
자식들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으려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
어쩌랴!
원하시는대로 하는 수 밖에.
엄마의 마지막을 볼 가능성이 없다는 직감에
물끄러미 엄마의 얼굴을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