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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May 08. 2022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이제 너와 함께 손잡고 가고 싶다

사진 : 재능TV



대한의 건아로 태어난 자, 로봇과 공룡과 자동차의 세계 있을진저.


  태어나기 전부터 남녀의 유별함이 자명했던 우리들 앞에는 무수한 이분법적 갈림길이 있었다. 파랑 신발이냐 분홍 신발이냐. 두피가 훤히 보이도록 짧은 머리칼이냐 고무줄로 묶은 머리칼이냐. 티셔츠와 반바지냐 원피스냐. 칼싸움이냐 소꿉놀이냐... 집안과 동네의 모든 어른들이 당사자 대신에 결정해 둔 하나를 따라 나는 누워있다 기어가다 벌떡 일어나 걸었다.


  대여섯 살의 어린이날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간 완구점에는 소년 세계와 소녀 세계의 갈림길이 있었다. 갈림길은 처음부터 한 가지 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깥에서 소변이 급할 때, 파란 몸통 아래 치마 없이 파랑색 직선 두 개만 붙은 픽토그램이 있는 공간으로 곧장 발길을 옮기는 것과도 같았다. 설령 치마 달린 빨간색 픽토그램이 있는 공간을 선택했더라도 아버지는 지체 없이 나의 선택을 교정해 주었으리라. 잠깐,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너는 남자니까. 이쪽으로 가야지? 옳지, 착하다. 나는 되물음도 주저도 없이 로봇과 공룡과 자동차의 팻말이 꽂힌 쪽으로만 길을 내며 걸었다.  


  가지 않은 길은, 마법과 순정으로 온통 휘황했던 소녀만화는, 완전한 배제 대상이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인기 있었던 일본 태생의 마법소녀들과 현재의 디즈니가 있게 한 공로를 세운 프린세스들(관념 속에서 그녀들은, 러시모어 산의 미 대통령 얼굴 조각 같이 장엄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름 모를 한국의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 그들이 같은 반 여자애들의 입에 아무리 오르내리고 세상의 한 축을 이룬다한들 남자 아이에겐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이제까지 가본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만날 일이 없을 세계였다.


  우린 색깔을 알기 전부터 사방이 파랑색으로 칠해진 나라에서만 뛰놀았기에, 어떤 남자아이도 그 바깥의 세계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울트라맨> 이 나올 시간에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전설의 용자 다간>보다 <천사소녀 네티>를 좋아한다는 친구는 태어나서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런 남자 동무가 있다면...


  나는 필시 너를 별종 취급하거나 겉으로 가까운 체하면서도 실은 꺼림칙하게 여겼을 거다. 우리가 동네에서 함께 노는 사이이긴 하지만, 너무 가까이 오진 마. 너랑 단둘이 있으면 애들이 나까지 이상하게 볼 거야.  




  30년 뒤의 내가 여기 있다. 대여섯의 내가 삐뚤빼뚤 휘갈겨 쓴 문장을 지그시 살펴본다. 지우개를 들어 쓱 지워버리고는 그 자리에다 반듯한 필체로 고쳐쓴다.


  네가 방에서 숨죽여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보고 있었다면, 나는 너를 알아가고 싶을 거야. 겉으로 부끄러운 체하면서도 실은 속까지 가까워지고 싶어. 집에 놀러가도 돼? 너랑 둘이서 그걸 보고 어떤 부분이 재미있는지 들어야겠어.


  문장을 다 쓸 때쯤, <반짝반짝 캐치! 티니핑>의 엔딩 테마곡이 흘러나오고 퍼뜩 현실로 돌아온다. 솜씨 없는 손길로 묶은 머리에 분홍색 잠옷을 입은 아이를 안고 만화를 보는 중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만화를 보기 참 좋은 시간이다. 만화를 몇 편 보는 동안에 아침잠이 완전히 깬 아이는 아직 몽롱한 나를 돌아보며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한다.   


-아빠! 내 생일 때, 캐치 티니핑 장난감 사주세요.  언니들처럼  상자에 들어있는 레고도 갖고 싶어요.


  오냐, 오냐. 어린이날이랑 생일이 겹쳤으니 너 사달라는 것 다 사줄게.  대신 놀 때 아빠도 좀 끼워줄래? 아빠가 예전에 못 가본 곳이 있는데, 이제 너랑 함께 손잡고 가보고 싶거든.


아이와 나의 첫 레고 <인어공주 에리얼의 바다의 성 4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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