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세계관 및 도덕적 관점의 괴리, 언어적 한계에 의한 소통상의 오류, 물리적 공간 및 시간적 제약, 본능적 욕구의 충돌등 여기 굳이 적지 않아도 차고 넘쳐흐르는 수많은 장애요인이 인간관계에는 존재한다. 진화적으로 완성된 "무리"를 지어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의 생존 조건은 역으로 어떤 이에게는 극단적 선택을 취하거나 그 무리 자체가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혹함을 내재하고 있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인간은 생존 그 자체를 가지고 자연선택이라는 필터를 통해 더 이상 진화하는 종이 아니다. 문명은 자연선택의 사슬을 인간에 있어서는 이미 끊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명화된 우리는 무리생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고안된 집단 안에서의 열성인자의 배재 메커니즘을 아주 동물적인 감각으로 계속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래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눈치 보인다. 이 고도의 (수정하겠다..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눈치 게임에서 혹시 당신이 열성인자로 비친다 생각하면 관계 형성으로 인한 이익은 고사하고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당할 지경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열성인자로 판단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그 요인들을 감추거나 제거해 나간다 그게 생존에 결국 유리하기 때문이고, 이 테크닉은 집단 지성화 되어 문화라는 이름을 달고 우아하게 대를 이어 내려온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의 본질이라고 할 때 정말이지 대부분의 인간을 위협하는 동물이 가축화된 지금,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선택의 사슬을 부여잡고 가끔 맞닥칠 곰을 상대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근처에 마트가 있다는 가정 하에.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이 될 준비가 아직 덜 되고 여전히 문명을 즐기고 싶다면 결국 어렵던 싫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집단적 인간으로서 생존의 필요에 의한 관계 맺음을 제외하고 아주 이성적이고 싶어 하는 나라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관계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행동 요소를 가진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여기에 한번 적어 본다.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너무 많은 말보다는 짧고 간결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쓰는
대화의 주제가 한정되지 않은
타인에게는 관대하며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가혹한
궁금한 게 많은
재미있는
결국 위에 나열한 내가 인간의 본능의 탈을 벗어버리고 아무런 목적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의 요소는 내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요소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것의 반대되는 내용을 교차해 가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도 시간과 함께 나와 공진화할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시점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기준을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구성할 수가 없다. 나는 실시간으로 관계라는 것을 통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