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김을 만지다가...
아마 지금 이 시기, 살면서 도시락을 가장 많이 싸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매일 두 아이들의 도시락을 싼다. 간식 도시락 두 개와 점심 도시락 두 개. 새벽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를 할 수 있다. 누구보다 시간에 쫓기기 힘들어하는 나. 새벽 일찍 일어나는 괴로움이 시간에 쫓기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있다. 뭐 사실 이제 새벽 기상은 그다지 힘들다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아이들의 먹기, 놀기, 잠자기. 흔히 우리가 영아기 아이를 키울 때 '먹, 놀, 잠'이라 불렀던 어린아이의 일상. 몸집이 커진 아이들도 여전히 그 ‘먹, 놀, 잠’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더 농도있게, 더 많이 하고 있는 듯하다.
어제는 큰 아이의 소풍날이라 김밥을 쌌다. 한국과 떨어져 지내며 종종 이웃이나 부모님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데 어제는 김밥 김을 만지다가 엄마가 생각났다.
평생을 워킹맘으로 살아온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순수한 자유영혼이었다.
엄마는 말수가 적었지만 한 마디를 내뱉으면 그 말이 어찌나 가슴에 쏙 박히는지, 아직도 엄마의 말 한마디는 내게 영향력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노라 작정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태생이 별 걱정 없이 사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 또 쓰는 언어는 뇌의 회로를 거치지 않은 순정의 언어 같았다. 그런 엄마의 한 마디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쁜 중에도 엄마는 우리들의 운동회에 잠시라도 다녀 갔다. 내가 소풍을 가는 날이면 없는 요리 솜씨에 김밥을 싸느라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쓰기도 했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김밥을 싸는 엄마 옆에서 김밥 끝부분을 하나씩 주워 먹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늘 요리를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지금도 그렇다.) 김밥을 싸면서도 자꾸만 어린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재료는 이것만 들어가도 될까?" 하고 물어보셨다.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고등학교 시절 도시락 반찬은 늘 김치나 나물, 그리고 밥이었다. 그 시절 예쁜 도시락에 햄 소시지를 싸 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 도시락은 보온 도시락이었지만 보온 기능이 되지도 않는, 친척 언니에게 물려받은 무늬만 보온 도시락이었다. 엄마는 그 보온 도시락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보온력을 높이려 했고, 나는 보온이 잘 된다고 거짓말을 해 엄마 마음을 편케 했다. 겨울에도 맨날 찬밥을 먹었던 거다. 엄마가 가끔 돌김을 구워서 넣어주셨는데, 한 날은 학교에서 도시락을 꺼내다가 깜짝 놀라 김 봉지를 다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안성탕면이라고 적힌 봉지에 김을 넣어서 윗부분을 노란 고무줄로 묶어서 보낸 엄마.
나는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물었다. 다른 봉지도 있는데 왜 하필 안성탕면 봉지냐고 짜증을 내었다. 엄마는 "왜~ 라면 봉지가 얼마나 밀봉이 잘 되는데~ 김이 눅눅해 지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하고 말씀하셨다. ‘이 엄마 도대체 뭐야?’싶어 돌아서 허무하게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엄마는 늘 그렇지... 엄마는 뭐든 쉬웠다. 엄마는 늘 ‘그러면 좀 어때?' 하는 마인드로 사는 분이었다.
정 반대 성향의 아빠를 만나 자유로운 면이 많이 억눌리긴 했지만...
엄마는 나에게 늘 "괜찮다."했다. "뭐, 어때."하고 말씀하실 때가 많았다.
엄마는 늘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어린 나는 늘 엄마에게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나를 딸이기에 앞서 그저 한 '사람'으로 여긴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엄마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1퍼센트의 의심도 없는 분이었다. 늘 순수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나에 대해 물었다.
어제 아침에는 김밥을 싸다가 눈물이 터져버렸다.
며칠 전 통화 중에 엄마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정현아, 아이들만 수영시키지 말고 너도 시원하게 물에 들어가. 낮에는 낮잠을 좀 자고, 애들은 잘 클 거니까 너무 애들한테 매달려 있지 마."
엄마는 내가 본 어른 중에 가장 쿨하고 자유롭고 따뜻한 사람이다.
7월에는 엄마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