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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Sep 09. 2024

한국 여행기(2)

초록, 여름, 호수

7월 12일. 한국에 도착했다.

일주일 정도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고, 나는 조용히 머무르고 싶어 어디론가 떠났다.

’여름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하면서 산을, 계곡을, 호수를 거닐었다. 김민기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이틀이 지난날이었다.

자동차 플레이 리스트에 김민기 님의 노래를 가득 담고 그렇게 더 깊숙한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도로를 달려 더 생생한 자연을 찾아갔다.

어떤 한 분은 “김민기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서울로 가자.”라고 하기도 했던 날.  내 힘든 시기에 음악으로 힘이 되어준 김민기. 그분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그를 보내어 드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초록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초록이라고는 찾기 힘든 나라에서 지내다가 눈앞이 온통 초록인 장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오랜만에 에어컨 바람이 아닌 자연 바람을 맞으며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또 그리웠던 한살림 막걸리도 꺼내어 계곡물에 담가 놓고,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소리를 듣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도 찍었다. 가끔 이렇게 사진 찍는 일 외에 휴대폰을 꺼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요가 바지에 맨발 차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맨발이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시원해진 막걸리를 나 한 모금, 그리고 김민기 선생님께 한 잔 올렸다.


초록 세상에 머무는 동안 가끔 소나기가 퍼부었다. 소나기 치고는 오랜 시간 내리긴 했지만…  장대비를 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메마른 사막 땅에서 지내던 나에게 비는, 아니 장대비는 마음속 찌꺼기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며칠 머무는 동안 거의 같은 시간에 쏟아진 세찬 비. 그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어느새 비 갠 하늘에는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습하긴 해도 청량해진 공기를 느끼며 맨발로 걸었다. 뜨거웠던 대지에 쏟아부은 비는 땅을 적당한 온도로 식혀주었다. 체온과도 비슷해진 것 같은 온기를 품은 땅을 밟으며 자연스레 내 호흡도 길어졌다.

걷다가 만난 호수, 그 호숫가를 잊을 수가 없다. 첫 발걸음을 뗄 때는 안개가 자욱해 몽환적인 분위기의 호수였지만 그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출발점을 바라보니 어느새 안개는 온 데 간데없고 나는 호수 가까이에 도착해 있었다. 출발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호수, 돌로 깰 수 없는 거울

파랑과 하얀 물감을 풀어놓은 하늘은 이제껏 본 어느 수채화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다 시선을 낮추어 호수를 바라보니 거울 같은 풍경이 있었다. 호수에 비친 하늘은 더없이 깊어 보였다. 순간 소로우가 생각났다. 소로우는 그의 책 <월든>의 호수 편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싫증이 날 때는 평소에 돌아다니는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숲과 새로운 풀밭’을 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가능하다면 우주를 창조한 분과 함께 거닐어보고 싶다’는 말로 자신이 산책을 하며 든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호수를 ‘하늘의 물’, ‘돌로 깰 수 없는 거울’이라고 표현한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내가 만난 그날의 호수가 그랬다. 자연 속에 머물며 자연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부다비 사막에서도, 그리고 여름의 한국, 어느 호숫가에서도 느끼게 된다.  호수를 걷는 내게 소로우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틀 연속 비슷한 시간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근처 정자로 갔다. 차를 타고 비를 피해도 되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정자에 앉아 비바람이 치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한동안 없을 일이라 여겨졌다. 초록 논과 초록 산이 어우러져 어디에도 다른 색은 볼 수없었다. 그저 맑은 빗물만 바람에 날릴 뿐…

또다시 맑아지는 하늘, 언제 그랬냐는 듯 내려쬐는 해 아래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나무의 몸통, 벗겨진 껍질, 또 다른 나무의 몸통에 비치는 나뭇잎의 그림자.

한동안 내게는 일상일 수 없었던 나무 관찰, 호숫가 산책., 그리고 장대비...

멀리 떨어져 살며 그리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초록 세상이다 싶은 순간이었다.

나무의 몸통, 그 위 그림자


아부다비에 돌아와 지난 여름을 떠올려보니 너무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호수 산책, 초록 풍경, 그리고 한여름의 장대비! 어쩌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경주 너른벽 서점에 들른 날 문서진 작가의 <호수 일지>를 집어든 건 우연일까? 책을 집어 들자 옆에 있던 친구가 본인 카드로 결제를 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한국의 여름과 호수를 아부다비로 가지고 오게 되었다.  친구의 책선물 덕분에… 며칠 전, 김민기 님의 ‘아름다운 사람’을 듣다가, 문서진 님의 ‘호수 일지’를 읽다가, 한국의 여름이 생각났다. 그때 마시던 시원한 막걸리 생각도 났다. 초록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때.  마음속 깊이 간직할 그 여름. 2024년 7월의 여름은 강렬하고도  또렷하게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호수 일지>의 저자가 챕터의 마지막이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내일도 나와 호수가, 내 사람들이 무사하길 빈다.'

그 여름의 호숫가가 무사하기를, 다시 아부다비로 온 나 또한 무사하기를...


가져온 여름, <호수 일지>_문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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