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그 집> 이야기
여름, 여름, 또 여름의 뜨거운 아부다비 일상을 뒤로하고 7월의 어느 날 경주로 갔다. '외동, 남경주' 초록 이정표를 향해 우측으로 차를 돌리며 두근대는 가슴으로 경주에 도착.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가지고 '경주 그 집'에 도착했다. 초록 잔디와 꽃모양 바람개비가 제일 먼저 반겨준다.
누군가가 살던 집. 지금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집. 주인이 수시로 바뀌는 경주 그 집의 주인으로 열흘가량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변변한 내 집 하나 없는 나는 잠시 머무는 집이 내 집이라 여기며 지내고 있다. 숨쉬기 힘들 정도의 뜨거움과 잠시 안녕하고 도착한 경주는 견딜만한 따끈한 날씨였다.
한국 떠나기 전 자주 드나들었던 경주 그 집. 곳곳에 추억이 서려있다. 텃밭에는 고추와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그 옆 감나무. 오래전 그 아래에서 홀로 요가를 하기도 했었다.
집 맞은편 담벼락에는 여전히 허브들이 자라고 있고 왼편으로 돌아보니 벌써 대추가 열렸다. 알이 굵은 대추를 친구와 함께 따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참,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이곳에서 숲을 가족들과 송별회도 했었지.
잠시 추억에 잠겼다.
밤에는 이곳 관리인인 친구가 이불을 가지고 나를 보러 왔다. 반가운 얼굴. 어제도 본듯한 그 얼굴을 보니 내가 경주에 왔구나 싶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농담을 건네었다. 경주 친구들은 눈을 3초 이상 마주치면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친구들이다. 그날 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아침이 되어 차를 마시고, 밀린 빨래를 했다. 그 집 앞마당에 빨래 건조대를 놓고 물기 머금은 빨래들을 탈탈 털어 널었다. 미지근한 바람과 따끈한 태양이 빨래를 잘 말려주겠지 했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빨래하는 재미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볕이 좋아 금방 마르는 빨래. 걷어서 고이 접고, 정리하고… 한국으로 여행을 왔노라 너스레를 떨었지만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빨래 덕분에 말이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내가 빨래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빨래를 하는 것도, 해 아래 마르는 빨래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
마당 텃밭에 열린 토마토와 오이, 고추로 아침 식사를 대신 했다. 따끈한 토마토와 오이는 아침 태양 기운을 머금은 듯했다. 내 손으로 따먹는 채소가 얼마만인지... 이 채소들을 키워낸 손길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고추를 따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가 “아 고것 참 실하네.”하셨다. 나는 입주한 지 하루밖에 안 되어 얼굴도 모르는 옆집 아저씨인데.. 마치 늘 보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셔 나는 그만 “좀 드릴까요?”했다. 마치 이 텃밭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이고추 큰 것 몇 개 나눠드리고 아저씨와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씩 웃으며 "오늘 점심때 이걸로 잘 먹겠소." 하셨다.
책 월든으로 이야기할 자리들이 있어 월든을 가지고 왔었다.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집 앞 도로를 지나 정자 아래에 앉았다. 아부다비의 바람과는 비교도 안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정자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고쟁이에 헐렁한 티셔츠, 그리고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내 차림새는 누가 봐도 이 동네 아줌마 같았을 것이다. 드러누워 책을 읽다 하늘을 보다 했다.
빈둥거리다 숙소로 가서 며칠 전 만난 친구 어진이 농사지은 단호박, 아침에 텃밭에서 따놓은 고추, 토마토를 살짝 굽고, 두부와 부추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오후에는 바깥일을 보러 나갔다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걷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익숙한 숙소라니... 잠시만 내 집이지만 참으로 편하도다...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경주 그 집>은 초록 검색창에 치면 금세 뜨는 정식으로 등록된 독채 펜션이다. 친구의 부모님이 사시던 집, 지금은 친구가 관리하고 꾸려가고 있는 집. 주말이면 손님이 끊이지 않는 숙소이다.
친구 찬스로 편안한 그 집에서 7월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아부다비에 일 년을 살다 왔으나 그 집이 내 집인 양 텃밭에서 채소를 따고, 이웃과 인사하며 책을 읽고, 간단히 끼니도 때우고... 맨발로 걷다가 이곳에서 내 손님도 맞았다.
칫솔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제로웨이스트 활동가인 주인이 센스 있게 마련해 둔 나무칫솔 하나를 사용했다. 칫솔통에 칫솔 값을 넣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자율적으로 구매, 사용하도록 주방 한편에 마련된 깨알 제로웨이스트 부스가 귀여웠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흐려졌다. '경주 그 집' 덕분에...
새로 지은 집이 아닌 누군가 살던 집이란 걸 아는 나는 집 둘레를 둘러보며 옛집은 어떠했을까? 여기에 살던 어른들은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지내셨을까? 떠올려보았다.
내 집 같은 편안함은 꾸며내는 것이 아님을. 누군가 일구어놓은 텃밭을 보며, 또다시 계절의 흐름을 타고 열매를 내는 대추나무를 보며 생각해 본다.
그 집을 관리하는 친구는 나를 손님으로 생각했을까? "음식물쓰레기를 버려줄게. 수건을 빨아다 건조기에 말려서 갖다 줄게." 집주인은 손님과 친구의 그 어디쯤으로 나를 대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해왔다.
짧은 기간 내 집이었던 그 집. 머무는 동안 다양한 손님들이 다녀갔다. 머문 날 수보다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다. 편안한 집이어서였을까? 초록 마당을 바라보며 또 창밖을 바라보며 웃고, 눈시울을 붉히고, 서로가 부재했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주절주절 수다를 떨며 마음을 나누었다.
그 집 마당에서 본 석양이 떠오른다. '그래. 이게 경주의 석양이지.' 한동안 내 집이었던 그 집의 일정이 저물었다.
떠올리면 따뜻했던 공간, 자연스러운 손님맞이. 집이란 이런 공간이지 하며 맘 편히 뒹굴었던 경주 그 집. 언제 또 가게 될까? 대추가 익을 때쯤 바구니 가득 대추를 따러가야지. "Thank you. R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