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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Feb 24. 2023

궁녀들의 산

신랑과 싸우면 다음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어머니는 신랑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만큼 신랑의 흉을 시원하게 잘 받아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가 우리 신랑을 “속없는 놈!”하며 거침없이 욕해줄 것이며, 내가 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들을 수 있겠는가. 조금 이상한 그림인 것도 같지만, 나는 어머니가 진심으로 며느리를 이해해주는 것을 믿는다. 아버님과 신랑이 꼭 닮은, 함께 이불 덮고 사는 사람만이 느끼는 독특한 고집은 어머니와 나 둘만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버님에게 힘들어하시는 부분이 곧, 내가 신랑에게 느끼는 부분이다. 아버님의 훌륭한 인성은 신랑이 비슷하게 닮아 있다. 장점 보고 살고, 또 단점은 견뎌내며 산다.

이제는 한 명이 더 늘었는데 신랑과 똑같이 자라고 있는 우리 첫째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신랑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며, 그 아비에 그 아들임을 함께 한탄해주신다.


지난 주 어느 날. 신랑과 사소한 일로 감정싸움이 있었고, 다음 날 어머니와 수다가 필요했다. 어머니께 산에 가자고 했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산 하얀 털모자를 쓰고 나오셨다. 우리 동네에는 해발 132미터밖에 되지 않는 키 작고 아담한 이말산이 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산책인데, 그래도 산은 산이라 구석구석 산을 밟으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리고 오전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잠깐 맑은 공기를 마시기에 너무 좋다. 사실 어머니는 이말산 등산 베테랑이고 꾸준히 나에게 함께 하기를 제안하셨지만, 나는 셋째를 낳고 내 몸이 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서야 산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에 올라보면 알겠지만, 젊은 사람은 잘 없다. 바람은 차지만 가지에 와 닿는 햇살에 봄이 느껴지는 어느 날 아침. 똑같이 생긴 하얀 털모자 두 개가 이말산에서 몹시 시끄러웠다.


 우리는 얼마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얼어있는 땅을 밟으며 걸었다. 낙엽들이 사락사락 놀란 소리를 냈다. 나보다 훨씬 산을 잘 아는 어머니가 미끄러운 길을 피하라고 앞장서 안내해 주시고 나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이십분쯤 걸었을까. 벤치가 보이는 곳에서 내가 커피와 떡을 꺼냈다. 어머님은 “커피 먹으면 오줌 마려운디…….” 라며 망설이시다가 그래도 나의 권유에 한 모금 드시고는, 아이고 맛나다, 환히 웃으신다. 나도 떡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비로소 산을 둘러본다. 산도 낮고 아직 올라온 길이 얼마 되지 않아 산 아래가 멀리 보이는 전망 따위는 없다. 벤치 앞으로 오래된 철봉과 녹슨 벤치 프레스 기구가 놓여있고 말라버린 낮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털모자가 필요할 정도로 아직 날이 차지만, 입에서 따뜻한 숨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기분 좋다. 산의 정기가 맑은 탓이다.


평소 잘 안 드시던 커피를 드셔서 일까. 어머님은 그때부터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셨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망을 보고 어머니는 급한 볼 일을 해결하셨다. 그리고 오 분이 채 되지 않아 계속 발을 동동거리셨다. 시골에서 밭 매다 아이 셋을 낳고, 산후 조리를 거의 하지 못한 어머님의 방광과 자궁이 망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실금 증상이 그렇게 심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음료나 물을 마시면 곧장 몸 밖으로 직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를 낳고 나서 여자들의 몸이 얼마나 상하는지 이야기하며 걸었다. 한참 신랑 흉을 함께 보던 고부는, 이제는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의 인생을 한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청춘을 돌려다오오.” 노래를 흥얼거리시더니 또 화장실이 급하다며 허둥거리신다.


그날 산보에서, 처음으로 궁녀의 무덤을 보았다. 뒤에 인터넷에서 기록을 찾아보고 안 것이지만 이말산 전체에 조선시대 궁녀와 내시들의 무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평생 임금을 모셨지만 죽어서는 직장에서 죽을 수 없었고 그들이 평생 모은 돈으로 진관사 등에 시주를 하고 죽음을 부탁한 것이다. 조선시내 성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지만 다행히 우리 동네 이말산은 성 밖에 있었다.


후손이 없는 궁녀의 무덤을 챙길 사람은 없었다. 후손도 없이 평생 임금을 모시다 늙어서 이렇게 산에 묻힌 궁녀들의 죽음이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절의 차가운 방에 홀로 몸을 뉘고 바람이 문을 흔들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다. 거동이 불편할 때는 누가 도와주었을까. 그리고 눈을 감는 그 순간은 누가 곁에 있었을까. 산을 오르며 자주 궁녀의 무덤을 보았던 어머니는 바삐 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궁녀의 무덤 앞에 한참 서서 그 비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머님은 또 그 무덤 곁에서 급히 볼 일을 보셨다.


문인석은 무덤 곁에 친구처럼 세워주는 돌상이다. 그나마 돌봐주는 후손이 없으니 이마저도 모두 목이 잘려있다. 문인석의 목을 가져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했다. “아들 낳겠다고 밤에 몰래 산을 탔다는 거여.”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셨다.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산을 탄 사람도 그 옛날, 아들을 낳아야만 살 수 있었던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평생 가족 없이, 후손 없이 살다 외롭게 죽은 궁녀들의 무덤 위에서 한 사이좋은 고부가 각자 신랑의 흉을 실컷 봤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또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의 시름을 이야기했다. 오랜 세월 산이 품고 있었을 이야기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제 내려가서 아버지 점심 챙겨줘야지.” 나는 바쁘게 앞장 서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랑과 아버님과 의논해 얼른 어머니 수술을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중천에 떠오른 해가 땅을 덥혔는지 발에 닿는 흙길이 보드랍다. 궁녀들의 산에도 다시 봄이 오나보다.





우리 동네 이말산에

도토리가 해마다 구른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비탈진 산을 오르내리며

등산가방 한짐 채운 도토리

가루내어 큰 솥으로 팔 빠지게 저으면

뜨거운 도토리묵 한사발이 된다

다람쥐야 미안해

우리 아들이 묵을 참 좋아한단다

이말산에는 자식 한 번 품지 못한

궁녀들의 무덤이 있다

궁녀를 지키던 석상은

아들을 낳고 싶은 여자들이 머리만 훔쳐갔다

머리를 어디에다 썼을까

산기슭 곳곳에 머리 없는 석상이

많이도 숨어 있다

도토리는 매해 또 구르고

늙은 부모들은 도토리를 모으고

다람쥐는 제 새끼 먹이를 잃고

아들 없어 서러운 궁녀의 무덤 위로

해마다 도토리가 도토리가……도글도글 구른다


- 2023. 2. 25 <도토리가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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