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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May 08. 2023

시의 가장 나중 지닌 것

AI의 시는 시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등단 시인도 아니고, 이렇다 할 멋진 시를 써 낸 적도 없다. 철저히 아마추어이거나 그저 습작생으로서, 제기된 주제에 대해서도 조금은 뻔뻔한 주장을 내놓으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정확한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저 ‘영감’에 의한 것이다. 시를 ‘더 깊은 헛것을 향해 애쓰는 행위’에 빗대어 말한 시인의 말에 기대어 나도 헛것 같은 주장을 애써 해본다. 


  “시의 가장, 나중된 것.”라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고개를 들며 한 번 을 내뱉었고 그리고 나에게 단어 하나가 각인되었다. . 동시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는 우리 아이의 머리통(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정수리)이었다. 아이 즉 어미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정수리에 숨구멍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의 엄마들이 신생아의 숨구멍을 볼 때마다 한을 쉰다. 내가 낳은 작고 말랑한 생명체가 살아서 팔딱거리는 모습 앞에 생기는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 때문이다. 숨구멍은 자라며 서서히 닫히지만 나는 아이들의 정수리를 보며 늘 을 생각했다. 작고 뜨거운 이 팔딱거리던 순간. (어느덧 나보다 키가 커버린 첫째 아이는 더 이상 ‘팔딱거리지’ 않는다.) 그 이 “시의 가장 나중된 것”에 동시에 떠오른 이미지였다. ‘숨이 가장 나중까지 붙어 있었던 순간’ 할 때의 그 숨이고, ‘숨을 쉬다’ 할 때의 그 숨이고, 제주 방언 ‘숨비들다’ 할 때의 그 숨이다. 내가 받아보는 문학 계간지에 언젠가 젊은 등단 시인의 시가 실렸다. 나에게는 전혀 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에게 시로서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질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는 시냐 시가 아니냐 하는 판단 자체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시적인 영감을 많이 주는 우리 둘째의 경우, 그는 언어에 생기발랄한 을 늘 불어넣고 그리하여 나는 그의 언어가 모두 시라고 느낀다. 


  비가 잠깐 스쳐 지난 오후였다. 아이는 어디선가 치즈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디 깊은 곳에서 생쥐들이 치즈를 먹고 있나봐. 그리고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찍찍. 그의 “찍찍” 이라는 소리가 선명한 무엇이 되어 축축한 바닥에 고무공처럼 바닥에 튕겨 올랐다. 그리고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의 숨이 배어 있는 생생한 음성이었다. 


  나는 ‘찍찍’이라는 단어를 흔히 보았을 것이다. 굉장히 친숙한 의성어이지만 그 글자를 보며 단 한 번도 시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아이의 살아있는 숨을 거쳐 나왔고, 나는 그의 음성을 그의 과 함께 들었다. 나는 그의 숨이 배어있는 음성에 감응했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시가 되었다. 아이는 새를 운다, 하지 않고 누군가의 부름에 대답한다고 느끼고 봄에 오는 첫 비를 ‘달다’고 느낀다. 그가 차창을 열어 내밀던 분홍 혀에서도 나는 시를 읽었다. 그것이 감응이다. 감응시키는 행위와 감응하는 행위는 숨을 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과학적으로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도 살아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살아있는 대상으로 대하며 또 그것을 살아있는 생생한 상태로 표현하는 언어, 그리고 그것을 살아있는 언어로 느끼는 것. 그것이 감응의 순간이며, 시이다. 


  ‘아파트’가 시인에게 시가 된 것은 아파트가 울고 있다고 시인이 느꼈기 때문이고 ‘과거’가 시가 된 것은 과거가 살아서 뒷걸음질 치는 생생한 이미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직 아파트는 살아 있지 않았고, 아파트가 운다는 것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아파트가 운다>라는 시를 읽고 나서 그 뒤로 아파트는 내게 (간혹)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AI의 시가 시가 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나는 그것은 출발에 있어서 시는 아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생생한 을 느낀다면 시일수도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될 확률은 희박하다. 내가 아는 한, 시를 읽는 사람의 감응이라는 것은 쓰는 사람이 이미 감응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고 그것이 서로 맞물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읽는 사람이 시의 숨을 느낀다는 것은 쓰는 사람이 온 을 다해 썼을 경우에, 백분의 일 확률로 통할까 말까이기 때문이다. AI는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쉽게 쓴다. 숨 쉬며 바라보고 숨 쉬며 느끼지 않고, 한  쉬지 않는다. 을 불어넣지 않는다. 그저 무수히 많은 데이터 중에 찾아내어 골라낼 뿐이다. 내 머리를 쓸던 나의 할머니의 오래된 손, 슬리퍼 안에 버려져 있던 나의 아버지의 낡은 발등, 그리고 수십 년을 장롱 속에서 묵묵하게 버티고 있던 나의 어머니의 단추통 그런 것에 느끼는 생생한 이 AI에게는 없다. 그리고 사실 나의 그러한 기억들이 나에게도 온전한 숨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혀야겠다. 나는 정말로 엄마의 단추통이 어느 날 내게 숨을 쉬며 말을 걸 것 같았는데 (아직은 걸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그 단추통이 장롱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은 내게 시적이었다. 내가 일곱 살 즈음 먹던 비타민 통이 단추통이 되어 있었고 우리 남매가 무심코 흘렸던 단추들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로 쓰겠다고 끄적였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시가 되지 못했다. 나는 엄마가 어린 나의 내복 소매에 단추를 달며 불어넣었던 숨에 온전히 감응하지 못 했구나 깨달았다. 일곱 살 내 아이의 말은 곧장 시로 받아들이면서 늙은 엄마의 수십 년 된 단추통은 딸에게 아직 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숨 쉬며 생각하는 대부분의 대상이 우리 아이이고, 그리고 아주 작은 비중이 나의 엄마일 것이기 때문이다. 숨 쉬는 내내 대상에 대해 골몰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대상에 나의 숨이 가서 닿는다는 것, 그 뒤에야 그 사물이 숨이 붙고 시가 된다는 것. 그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숨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시이다.

숨은 개인적이다. 

누구에게 죽은 것이 누구에게 숨 쉴 수 있다.

누구에게 숨 쉬는 시는, 누구에게는 숨 쉬지 않는 시일 수 있다.

그러나 AI의 시가 숨 쉴 경우는 0.0000000000000000000001퍼센트라고 답하겠다.



- 시 창작 수업 10주차 레포트  '시의 가장 나중 지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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