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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Jan 11. 2023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나의 시아버님은 손이 정말 크다. 내가 태어나 만난 일반인 중 가장 큰 손을 가진 것에 틀림 없다. 아버님의 손 끝에서 서울 외곽 지역, 수 백 의 빌라 뼈대가 만들어다. 원래도 큰 손을 가지셨지만 젊은 일꾼도 버거운 철근을 몇 개씩 들어올리며, 그리고 맨 손으로 철사를 꼬고, 꼬은 철사로 철근을 엮으며 아버님의 손은 더 굵고 뭉툭해졌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아버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꺼냈다.


"아버님, 이제 정말 일 그만하시면 안되요?"

"왜."

아버님은 벌써 방어태세를 갖춘다.

"아니, 너무 추울 때만 아버님 부르잖아요. 노인들은 추운 날씨가 제일 위험하다는데, 나가지 말라고 안전문자도 오는데."

"괜찮다! 내 몸은 내가 잘안다.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하는 것이다."


당신의 반응은 언제나 같다. 나가서 일하는 게 훨씬 덜 아프다고 못을 박으신다. 일 없이 집에 계시는 날의 아버 표정을 알기에 또 그런가요, 하고 멍청하게 댓거리를 않는다. 시집오고 십오년간 이어온, 하나마나한 실랑이다.


"너희들 아픈게 내가 제일 힘들고, 너희가 건강하고 행복하면 나는 그 뿐이다. 그것이 가장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다. 너희가 건강하고 오손도손 잘 살면 그게 나의 가장 큰 행복이다. 내 걱정은 마라."


그 단호한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단지 피를 쏟아서 쓴 글만 사랑한다"고 했던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버님의 그 말, 피를 쏟아서 만든 '진실'임을 안다.


아버님의 오십 년 세월은 투명하고 정직했다. 고된 노동이 그대로 아이 셋 먹거리, 입을 거리가 됐다.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삶. 매일 같은 김칫국에, 아이들 몸보다 두뼘은 큰 옷을 입히며 절약한 아버님의 일당으로 조금씩 집을 넓힐 수 있었다. 우연히 산 허름한 집이 개발의 붐을 타고 운 좋게 폭등했다더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달동네 쪽방이 월셋방으로, 월셋방에서 전세로, 서울 변두리 임대 주택으로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고 번듯한 대학 다 보내고 나니 여든이 넘은 아버님의 생이 남았다. 그럼에도 아버님은 여전히 추운 날 새벽일을 가시고 그렇게 번 돈으로 손주 소고기 사주시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어머님께서 아버님 작업복 등을 새 것으로 샀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버님도 무엇인가에 노동의 힘겨움을 잊고, 인생을 즐기고 싶지 않았을까? 막내 아들이 초등학교를 가던 해에 큰 결심으로 담배를 잘라버리신 아버님. 노동일 끝나고 언 몸을 녹이며, 더운 몸을 식히며 술모임에 기대기도 했으련만 아버지는 처음 몇 번 가 보신 후 얼씬도 않으셨다고 했다. 해 뜨기 전에 출근해, 해 지기 전 칼같이 퇴근하셨다. 꽤 큰 현금으로 하루 일당이 손에 쥐어지고, 도박이나 춤바람에 빠져 삶을 돌보지 않는 동료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한 번 가보니 재밌었어. 빠지면 크은 일나겠더라고. 정신 빠딱 차렸제, 울 새끼들 어떡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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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아버님께 생뚱맞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버님, 아버님을 이렇게 키운 것은 무엇이었어요?"


나는 내 질문의 의도를 안다. 나는 금쪽이에 나오는 상처 많은 아빠의 어린 시절을 더듬는 오은영 박사의 방식을 신뢰했다. 우리의 애잔한 엄마들, 아빠들. 그들에게 오랜 시절 되물려진 결핍이 나타나고마는 모습이 슬펐고, 엄마의 서툰 사랑이라도 벗어나려 애쓰는 몸부림, 아이가 결국은 엄마를 안아주는 그 기적을 믿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무엇인가 있다고 믿는 나에게, 아버님의 그 지독한 희생, 아버님의 자식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헌신의 비밀이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님이 내게 들려주신 아버님의 비밀도 나의 궁금증을 더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한 집안의 장남으로, 아들이기보다는 돈 버는 '일꾼'으로 살아야 했던 아버님.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의 집에 머슴으로 가야할 정도로 가난했던 당신이 어느 날 밭을 매다 너무 배가 고파 훔쳐 먹은 오이 하나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맞으셨다고 했다. 그 시절의 가난, 삶의 혹독함을 어떻게 다 짐작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배고파 오이 하나 훔쳐먹은 자식을 붙잡고 통곡하기는커녕, 그리 심하게 매질하였다니 생각할수록 나의 머리로는 이해기 힘든 일이었다.


신랑은 크는 동안 한 번도 아버님께 맞지 않았고, 아버님이 부득이하게 장남으로 짊어져야 했을 무거운 짐들을  단 하나도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아버님젊은 시절 그 길고 긴 귀경길의 어려움을 알기에 우리를 위해 시골로도 가지 않으시고, 우리의 곁에서 이렇게 손주들 봐주는 재미로 사신다. 반찬을 주시러 왔다가도 며느리 신경쓰일까봐 서둘러 자리를 뜨시고,  맛있는것 먹을 때는 당신은 배가 너무 부르다며 그저 흐뭇하게 바라만 보신다.


오은영 박사는 부모의 결핍이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자책하는 부부에게 그렇게 조언했었다. "부모의 결핍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끊어내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한다."






"아버님, 아버님을 이렇게 키운 것은 무엇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음, 아버님, 아버님이 이렇게 훌륭한 인을 갖추게 되신 비밀이 궁금해서요. 누가 영향을 줬나 하고."


아버님은 멋쩍어하 그렇게 대답하셨다.


"그냥 우린 다 먹고 살기 바빴지. 네 할아버지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 부모로부터 받은 설움을 물려주지 않는 일. 그것은 뼈를 깎을 만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내 부모가 했던 부당한 말을 아이에게 그대로 하고 있더라는 한 엄마의 말에 그래도 훨씬 더 나은 엄마가 되지 않았냐며, 위로했다. 혼자 남은 친정 엄마에게 폭언을 듣고, 맞으며 자랐다는 그녀였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들을 물고 빨며 혼신을 다해 키웠다. 친정 엄마가 아직 원망되지만, 그래도 힘껏 더 좋은 삶을 물려주려 애쓰며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 그렇게 결핍의 꼬리가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을 우리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아버님 역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끊어내셨다. 아버님을 보면,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가 생각난다. 아버님이라고 해서 즐기고 싶지 않았을까. 젊은 나이에 고된 하루를 한 잔 막걸리로 달래고 싶지 않았을까. 잘생기고 키 큰 젊은이가, 고단한 삶은 잊고 한 번쯤은 낯선 여자의 품에 안겨보고 싶지 않았을까. 막노동 끝에 돌아온 한 칸짜리 집에 아이들이 싸우고 있으면 박차고 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몰랐을까. 왜 삶이 막막하고 지치지 않았을까. 왜 소리지르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아버님은 묵묵히 버티어내셨다. 아버님의 대에서 그 뿌리깊은 회한과 가난에 대한 한을 끊어내셨다. 오직 자식을 위한 지독한 사랑으로. 나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토니씨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고 출발이 달라요. 인생의 경험이 다르고, 인생의 경로가 다릅니다. 그래서 도달하는 지점도 다를 겁니다. 토니씨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_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오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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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네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ㅡ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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