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 만들기 & 중간보고
나에게 1주일이라는 기한이 주어지고,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가 오게 되었습니다. 1주일만에 '나 혼자' 밤새 고민하고 피땀흘려 작성한 최종보고서를 들고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보고서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독자의 질문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죠. 이것을 '주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이렇게 이렇게 대답하겠다"라고 써보는 것. 이것은 초안이라고 부르죠.
보고서를 쓰기 전에 전반적인 방향을 적어보는 거죠. 이야기의 논리를 스케치하듯이 일단 휘갈겨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목차를 정하는 스타일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바로 막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휘갈기거나 취합하는 형태도 좋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를 과감하게 작성해 보는 것도 좋아요. 구어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중에 문어체로 정리하고 목차로 구조를 나눈 다음 정리하면 되거든요.
초안을 만든 다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간 보고입니다. 저도 최근에야 중요성을 알게 된 건데, 적어도 초안을 가지고 중간 보고를 하지 않으면, 피드백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보고서를 삭제하고 다시 쓰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요.
보고서의 방향이 상사라는 독자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 다시 수정하거나 다시쓰는 수 밖에 없거든요. 내 생각의 방향이 상사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큰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초안을 가지고 먼저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부장에게 예산 추가를 요청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사업예산을 추가해달라는 요청을 위해 열심히 보고서를 썼습니다. 왜 예산이 필요한 지, 현재 현황부터 결론까지 완벽하게 작성을 했죠.
<업무상황>
- 협업기관, 부서와 예산 확보 방안을 마련하고 이미 최종 검토 중
- 사업 투입인력 채용계획, 자격조건까지 수립한 상태(연봉, 경력 등등)
- 위 내용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 후 최종 보고를 준비 중
완벽해 보일 수 있죠. 사업예산을 확보했을 때 인력과 사업방식, 예상 수익까지 보고를 하고 난 다음에는 상사의 허락을 기다리는 마음에 벌써 뿌듯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장님이 어떤 질문을 할 지 예상할 수 있을까요?
먼저 "WHY"를 재확인할 수 있겠죠. 왜 예산확보를 해야하고, 사업을 해야하는 건가. 여기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산 추가 없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물어본다면 어떨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준비가 되면 좋겠지만, 부장님의 관점이나 생각도 파악하지 못한 채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준비를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답변을 못하면 '부결', '재검토' 등의 말로 끝날 수 있겠네요. 욕 먹는 것은 덤이겠고요. "생각을 이 수준밖에 못하냐, 더 시야를 넓혀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야근하는 마음이 더 무거워질 수 있을 듯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간보고'가 여기서 필요할 수 있습니다. 보고하는 입장에서 본인이 생각안 '답안'을 2~3개 마련해서 짧게 보고하는 것이죠.
이 때 내가 준비한 답안이 상사의 맘에 안들면, 다른 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빽빽하고 정리된 보고서가 아니라 짧게 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보고서를 준비하되, 각각 성격이 다른 2~3가지 안 중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best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ex) 예상질문과 답안
- 비용이 적은 방법? → A안
- 비용이 들더라도 최상의 성과가 나오는 방법? → B안
- 기존의 인력을 활용하되 힘이 제일 덜 들어가는 방법? → C안
-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 A안 → 그 이유?
위와 같이 질문할 때 바로바로 나올 수 있을 정도만 답을 준비하는 것이 초안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핵심이 뭔지도 모르고 보고서를 만들려고 하죠. 그런데 보고서를 효율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초안을 가지고 중간 보고를 합니다.
중간보고의 또다른 강점은 비공식적으로 '부장님의 마음이 이거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부장님이 생각하는 이 주제에 대해 내 고민의 깊이는 이 정도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부장님보다 내 고민의 깊이가 더 깊어요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더 좋아요.
중간보고 없이 예쁜 보고서로 만든 게 상사의 맘에 안들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실무자는 스스로의 결론을 말할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상사는 내가 갖지 못한 경험의 넓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직장생활 5~6년차인 대리급보다 10년이 넘는 부장의 경험이 더 넓고 깊습니다.
고민의 깊이를 가진 내가 나의 결론을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경험의 넓이를 가진 우리 부장도, 독자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겠죠. 내 권리가 소중하다면 그들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고민만을 우기며 결재가 안되는 사실에 짜증만 낸다면 '꼰대'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내 결론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스스로 준비한 플랜 A, B, C, D의 객관적 비교가 근거자료와 함께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태도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는 안 해도 되지만 존중은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경험과 깊이를 가진 상사의 생각과 입장을 존중해야 하고, 설득할 수 있는 합리적 비교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문서 작성은 내가 상사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에요. 무기일 뿐이죠. 무기는 상대방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하면 충분합니다. 내 실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요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거죠. 중요한 건 소통하고 합의를 보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것을 보고서라는 글로 합의할 수도 있지만 구두(말)로 합의할 수도 있어요.
일 잘하는 사람들의 패턴을 보면 구두 합의를 먼저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고서를 예쁘게 쓸 필요가 없어요. 합의만 된다면 이를 적시해서 결재만 올리면 되거든요. 구두 합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보고서와 그 형식에 얽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이게 보고 받는 상사의 맘에 들면 업무가 끝이 납니다. 보고서를 안 쓰고도 일이 성사될 확률이 있다면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고서 쓰는 일 진짜 귀찮고 힘든 일, 비생산적인 일입니다. 앞으로 경력이 쌓이면 이런 보고서 써야할 일이 많은데 일일이 모두 신경쓰다가는 집에 제 시간에 퇴근할 수가 없을 수도 있죠. 그래서 보고서 없이도 일이 진행될 수 있다면 그걸 먼저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보고서 작성. 쫄지 마세요. 나만 어려운 거 아니고 다 어렵습니다. 다 어렵죠. 왜 어려운가 생각하면 상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어려운 것 같아요. 근데 그 생각을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사의 피드백 없이는 결재받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장 빠른 피드백을 받아내는 방법, 그게 우리만의 노하우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구두보고만으로 결재가 나는 방법을 추구하시되 '부득이하게' 써야만 한다면 잘 쓰자는 취지로 말씀드립니다. 써야만 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