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꼬치꼬치 묻고, 주의 깊게 보자.
in-depth history의 매력.
의사국가고시는 실습시험과 필기시험 두 가지로 나뉘어있다. 실습시험은 보통 9월~11월에 마무리되는데, 환자를 문진하고 진찰하는 과정인 CPX와 술기인 OSCE로 나뉜다. 모의 환자를 직접 상대하면서 문진을 하는데, 내가 또 이걸 굉장히 잘했었다. 맞다. 자랑이다. 증상에 대해서(혈변, 체중감소, 우울감 등) 하나씩 질문을 하고, 그에 맞춰 검진을 하고(복부 진찰이나 청진이나 뭐나) 진단을 내리고 교육을 하는 과정이 얼마나 빠짐없고 매끄럽게 되는지를 보는 시험인데, 그래도 공부를 좀 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증상에 대해서 하나씩 감별진단을 떠올리고 배제하는 과정이 재밌지 않나. 아마 내가 그런 걸 좋아해서 응급의학과를 한 것도 있을 것이다.
모의환자들은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답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 번에 3가지씩 물으면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대답해 준다. 고혈압이나 당뇨나 결핵이 있으세요? 하면 결핵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두루뭉술한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물을 때까지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입력값과 출력값이 명확하게, 물으면 정확히. 사실대로 대답을 해 주게 되어 있다.
의대생 시절부터 선배 의사들에게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역시나 "환자는 책대로 아파주지 않는다"라는 것인데, 정말 그랬다. 꼬치꼬치 물어야 했다. 인턴 때 내가 한 병력청취와 전공의 선생님들이 하던 청취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일을 처음 대했을 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 고혈압 없다며! 하지만 전공의 선생님이 물어봤을 때는 "고혈압 약을 먹고 있는데 정상혈압 나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했다고 하는 식이었다. 특히 이런 세심한 문진을 배우기에는 신경과 파견과 소아과 파견이 큰 도움이 되었다.
신경과 의사들의 꼼꼼한 문진과 정교한 신체진찰을 통한 뇌의 어느 부분의 문제인지를 파악해 내는 과정들을 보면 예술 같다. 경련을 하던 사람이 다시 경련 발작으로 오는 경우의 대다수가 약을 제 때 먹지 않아서인데, 이것도 "약 잘 드시고 계세요?" 식으로 물어보면 먹었다고 대답을 한다. 이때 신경과 선생님이 한 단계 더 나가서 "오늘 아침 약 드셨어요? 어제저녁은요?" 하고 물어보는데 환자가 "아 맞다. 오늘 아침은 빼먹었어요" 하고 실토를 하더라. 소아과는 또 어떻고. 밤에 숨이 가쁘더냐는 문진을 하면 보통 코막힘이나 콧물로 힘들어하는 것까지 보호자가 이야기하는 일들이 많은데, 실제로 호흡곤란이 있으면서 환아들이 보이는 증상 중 대표적인 것이 코 벌렁거림, 가슴이 움푹움푹 들어갈 정도로 호흡이 가쁜 증상 등이 있다. 그런 걸 구체적으로 말해야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온다.
꼬치꼬치 물어봐서 환자를 진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 있었다. 119에서 경련이 지속된다고 데리고 온 환아인데, 우리 병원에는 연고가 전혀 없는 아이. 구급대원 이야기로는 최근 코로나로 격리 중이었고 오늘이 마지막 격리일이라고 한다. 열경련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열도 없는 아이였다. 문진을 자세히 할 겨를도 없이 경련이 지속되니 기도삽관을 할 준비를 하며 혈관을 확보하고 아티반을 정주했다. 2번을 정주했는데도 경련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2차 약제인 포스페니토인을 준비하며 보호자를 불렀다.
과거력에 대해서 물어보니 뇌하수체 종양으로 수술하고 스테로이드를 복용 중인 환아였다. 스스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환아가 아니다 보니 외부에서 약으로 먹어야 하는데, 감염이나 수술 등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스테로이드 호르몬 요구량이 늘어나 2배 정도는 증량해서 먹게 한다. 보호자에게 스테로이드를 먹는지 물어보니 먹는다고 하였고, 최근 코로나 감염 후 증량 여부를 물어보니 증량을 해야 하는 줄 모르셨던 것.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역할 중 나트륨을 끌어들이고 칼륨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이 있는데, 호르몬 요구량이 늘어난 상황에서 보충이 불충분한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간이검사로 확인한 혈중 나트륨 농도가 110, (정상치가 135-145) 이런 경우에는 기저 원인이 교정되지 않으면 경련이 잘 멈추지를 않는다. 3퍼센트 염화나트륨 수액을 준비하고 정주하고, 과교정되지 않게 4시간마다 혈액검사를 하도록 처방을 내고, 혈액검사를 자주 해야 하니 동맥라인을 확보했다. 이전 다니던 병원에서 치료를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해당 병원과 연락하여 전원을 결정했다. 이후 환아는 완전히 좋아져서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아무리 영상검사나 혈액검사가 발달한 시기라 할지라도, 적재적소에 이런 진단 도구들을 쓰려면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감별진단과 검사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 어차피 혈액검사에서 결과가 나와서 저나트륨혈증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교정해서 치료를 하는 결과가 다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세심한 문진을 통해서 좀 더 빠르게 환자의 상태에 대한 감별진단에 도달할 수 있고, 이에 대해서 더 빠르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조금의 차이일 거라 생각하지만, 아무 데나 그물을 던져놓고 걸리기를 기다리는 어부와 목표가 분명한 어부가 포획하는 생선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병원에 오는 환자나 보호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자꾸 물었던 것을 또 묻는지 지겹고 안 그래도 힘든데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실 수 있다. 실제로도 그 부분을 많이들 불평하시는데, 이런 이유들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해 주셨으면, 열심히 꼬치꼬치 물어보는 게 환자를 잘 보는 정말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첫걸음이니까. 우리의 목적은 같다. 아프지 않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