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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Mar 16. 2024

30. 아무도 모른다.

나만 아는 아주 미묘한 차이.

응급실에서 날것의 환자를 보고 진단하고 치료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때로는 괴롭고 막막하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지적 희열을 주기도 한다. 단순하게 '루틴'으로 하는 검사를 하고 그 안에서 뭐라도 나올 것이라고 기다리는 일은, 판단을 회피하고 시간을 끄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무던히도 혼나면서 배워서일까. 나 역시 가르치면서 검사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잔소리를 달고 사는 편이었다. 결론은 검사를 해 봐야 나온다고 해도, 정확한 문진과 검진을 통해서 그물망을 서서히 좁혀가는 과정을 밟을 줄 알아야 검사의 해석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검사결괏값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것이 현재 증상과 관련이 있는 결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견된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현재의 증상과 연관이 없다면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그저 '뭐라도 나오겠지' 하고 그물을 던지게 되면 결론을 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전문적인 의학 교육을 받고, 혹독한 수련을 받은 의사와 의사가 아닌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소아 진료에 대해서 누가 두 달만 배우면 나도 할 수 있겠더라, 처방이 다 똑같던데, 하는 말을 보고 씁쓸해했던 적이 있다. 뭘 모르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임을 아는데, 의외로 의사들 중에서도 소아응급 진료라고 하면 감기 장염이 대부분 아니냐고, 경증 환자들도 호들갑 떤다는 시선이 은근히 있었다. 예전에 어느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께서 성인은 하루에도 기도 삽관을 몇 개씩 하는데 소아는 1년에 몇 개 하지도 않지 않냐고 뭘 그리 힘들다고들 하냐는 말씀을 하셔서 하루 종일 화가 났었는데, 그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무식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었다.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과정에 대해서 당신이 얼마나 알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만져보고 보호자의 사소한 진술에서 실마리를 잡아내는 이 과정에 대해서 얼마나 경험이 있다고 당신이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목 끝까지 올라온 이야기를 꾹꾹 눌렀다. 그저 감기 장염 보고 보호자 비위나 맞춰줄 줄 아는 사람들 취급을 하는 시선은 병원 내부에서도 있었다. 그야말로 일은 많고, 돈은 못 벌고, 잡음은 많은 '금쪽이'같은 집단들. 어차피 하루 이틀 열나고 배 아프고 토하는 애들, 조금만 숙련되면 저년차 전공의나 인턴들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검사나 처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만 아는 미묘한 진료의 질의 차이를 말하고 싶었다.


1. 열이 1주일째 나고 있어요.


-소아응급을 모르는 사람 : 아, 네 열이 1주일요. 피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내볼게요.

-나  : 일단 1주일이 맞을까요? 자, 오늘이 16일이네요. 우리 달력 보고 이야기할까요? 그럼 우리 친구가 9일부터 10, 11, 12, 13, 14, 15 16, 하루도 안 빼놓고 매일매일 38도 이상 발열이 있었어요?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보호자들의 대답은 이러하다. 9-12일까지 났고, 13일에는 안 났고, 14일에는  37도 후반대로 났고요, 15일 아침부터 38도 넘기 시작을 했어요. 통상적으로 24시간 이상 발열이 없었다고 하면, 이미 지나간 이야기. 24시간 이상 텀을 두고 새로 38도 이상 발열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기에 환아는 15일부터 발열이 시작되어 이제 겨우 24시간 남짓 된 발열이다. 환아가 90일 미만의 경우에는  이것저것 검사를 하지만, 한 돌이 넘은 경우는 요로감염 정도만 확인, 그 이상 연령대면 대개 바이러스 감염으로 간주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을 권유드린다. 검사를 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 드리면 보호자의 마음은 편하고, 나도 편하지만 아이는 주삿바늘 하나 잡는 것도 꽤 괴로우니까. 필요할 때 필요한 검사를 하는 것이다.


정말로 1주일 내내 발열이 있었던 게 맞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발열의 패턴을 물어본다. 9일에서 12일까지는 39도대로 나다가, 13일에는 38도대로 떨어지고, 14일에는 37도 후반에서 38도로 잡히나 싶다가 15일부터  다시 발열이 38도 이상으로 치솟았다고 하면, 하나의 감염이 끝나기 전에 새로 하나의 감염이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경우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고 건강하던 한 돌 이상 아이들이라면 경과를 지켜봄을 권유한다. 먹는 양이 반 이하로 줄거나 소변량이 줄어들고 처지는 등의 모습이라면 검사를 하면서 수액치료를 하는 것도 고려한다.


일 발열이 38도 이상으로 발열의 간격도 피크도 비슷하게 지속된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때는 감염이 아닌 다른 요인에 대해서도 고려한다. 96시간 이상 발열이 지속 시는 가와사키병에 대해서 고려하고, 환아의 증상이 그에 부합한 지(입술/혀의 발적이나 손발 부종, 림프절 비대, 결막 충혈 등)를 확인하고, 그에 준해서 검사를 고려하며, 림프종이나 백혈병 등의 혈액암이나 소아 류마티스 관절염같은 질병을 생각해야 한다. 간이나 비장의 비대가 없는지, 림프절 비대가 없는지 온몸을 만져봐야 하고, 비전형적인 발진이나 관절의 통증 여부에 대해서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염두에 두게 되면 시행하는 검사들 역시 종류가 더 많아진다. 단순히 응급실에서 기본적으로 내는 검사보다 오히려 시행할 것들이 많다. 그물을 더 넓게 쳐야 한다.


2. 무릎이 아프대요, 안 걸으려고 해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소아응급을 모르는 사람 : 다친 건 아니에요? 무릎 엑스레이 찍어볼게요. 성장통일 수도 있고요

-나 : 한쪽을 아파하나요? 일단 아파서 못 걷는 건 맞을까요? 부딪히거나 넘어진 건 아니고, 혹시 평소보다 많이 놀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한 번 걸어볼까요?


보행장애,라는 주소로 오는 환아들이 있다. 아파서인지, 힘이 빠져서인지, 아니면 소뇌 문제로 중심을 잡지 못해서인지. 이 3가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아프다고 하면 외상을 먼저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외상력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주의 깊게 물어보면  보호자가 아이가 다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인 경우도 있다. 검진을 해 보면 다친 흔적이 있는 경우도 종종 있고. 한쪽인지 양 쪽인지에 따라서도 판단이 달라진다. 양쪽 관절이 아픈 경우는 다른 관절이 아프지는 않은지, 전신적인 문제(류마티스 관절염 등)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외로 싱겁게도 전날 평소보다 많이 뛰어다니고 놀고 난 다음날인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무릎 통증이라고 호소하는 환아들 중에서도, 의외로 무릎 통증과 고관절 통증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무릎이라고 진술하는 일들도 제법 있어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Patric test라는 간단한 검진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리 한쪽은 쭉 펴고, 다른 다리는 4자로 만들어서 눌러보면 고관절의 이상시 통증이 유발되는데, 이 검진을 반드시 해 봐야 한다. 무릎이 아파서 무릎 초음파까지 해 봤는데 정상이고, 아프다고 해서 왔던 환아들 대개가 고관절의 통증이었다.


그럼 고관절은 왜 아플까. 이때부터는 일과성 고관절 활액막염과 세균성 관절염을 감별하는 게 필요하다. 전자는 쉽게 말하면 고관절에 걸리는 바이러스 감염인데, 선행하는 바이러스 감염이 있고 이후 한쪽 고관절의 통증을 호소하며, 치료는 진통제 및 침상 안정. 쉬면서 약 먹으면 된다. 하지만 후자는 수술적 치료와 주사 항균제를 반드시 써야 하는 무서운 병. 고열이 동반되고,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것은 물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일이 많고, 혈액검사상 CRP, ESR 등의 염증 수치 역시 상승해 있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감별진단을 떠올리고 배제하기까지, 단순히 검사를 긁는다고 해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아파하는 것이 맞나,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혈액검사는 하는 게 아니냐고, 엑스레이를 어차피 찍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결론으로 도달하기까지 진료의 질이 다르고 결과 해석을 하는 질이 다르다. 처음부터 무릎이 아니라 고관절이 문제임을 알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3. 혈변을 봐요.


나라고 검사를 최소화하고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검사는 빠르게 시행하는 쪽이고,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검사를 하는 편다. 특히, '혈변'이라는 주소로 응급실에 들어오는 아이들에게는 나는 아예 초음파를 보면서 진료를 시작한다. 적어도 이것이 장중첩증은 아니라는 판단을 해 줘야, 공기정복술을 통해서 말린 장을 펴 주지 않으면 장이 썩어 들어가는 그 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줘야 그다음이 있다. 대부분은 장염 끝에 설사하면서 혈액이 조금 묻어 나오는 일들, 아니면 변비가 심한 환아라 항문이 찢어지면서 나온 케이스들이고, 간혹 알러지성 장염이라고 2개월 전후 환아들이 유단백에 알러지를 일으키며 혈변을 보는 경우가 있다. 혈변 양이 많고 혈압이나 맥박수가 흔들릴 정도라면 당연히 그것부터 처치하는 것이 먼저지만, 아닌 경우 중 적어도 내가 시술이나 처치가 필요한 병이 아닌지를 바로 판단해 줄 수 있다면 무조건 하는 것이다. 초음파를 통해서 탈수가 심하지 않은지 등도 확인해 줄 수 있어서 수액치료를 고려하는 척도로도 이용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보호자의 만족도도 꽤 높고, 나도 좋다. 혈변 외에도 장중첩증의 증상 중 하나인 반복적인 보챔이나 구토를 심하게 하는 경우, 심하게 처지는 경우에도 침상 옆 초음파를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적어도 어느 증상에 대해서, 적어도 놓치지 말아야 할 질병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누가 진료 더 잘했다고 상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과정들이 재밌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같은 소아응급 하는 사람들한테나 공감을 얻는다. 다른 분야의 의료진들도 내가 그들의 일을 모르듯이 모를 수밖에 없고, 하물며 보호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냥 나만 아는 내 수고일 뿐이지만 그래도 내 자부심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이 과거형이 되어가는 현실이 씁쓸하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내가 버티는 이유에는 '그래도 나한테 온 애들은 내가 정성껏 잘 봐주긴 하지.'라는 자부심, 그것 하나였다. 과거형으로 묻힐지, 현재형으로 바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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