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3월 초순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한낮의 공원은 고요한 가운데 적당한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산책로에는 개를 동반한 가족들과 젊은 커플, 운동복 차림으로 러닝을 하는 중년 여성,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노인들이 나와 있었다. 재경도 그 사이에 섞여 느긋하게 보도를 걷는 중이었다. 속으로 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면서.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현기증이 나. 때로는 달리는 기차를 멈춰 세우고, 기차 밖의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져.
느긋함. 이맘때의 공원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단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재경은 길 왼편에 늘어선 수목의 빈 가지와 낙엽 뭉치들, 오른편에 잔잔하게 펼쳐진 호수의 정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연의 시간과 인위의 시간 사이에는 언제나 틈새가 있기 마련이라고.
나무들. 언제부턴가 그녀는 나무를 경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선 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로 시간 속에서 고유하게 깊어져가는 존재들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건 재경에게 꽤나 어려운 과제였다.
아니, 어쩌면 재경이 나무를 보며 느끼는 지루함에 대해 나무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어이, 난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 인간들의 편협한 관점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야. 이곳에 서 있으면 낮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각할 수 있어.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매년 가지로부터 조그만 싹을 틔우고, 키워내고, 비우는 일을 반복하지. 죽음 앞에서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벌레들, 나비와 새들, 개들, 그리고 너희 인간들과 더불어서 말이야.
나비. 몇 해 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흰 나비의 환영을 마주했다. 밤의 시간으로부터 이어진 무의식의 잔상이었을까. 어둑한 허공 속에서 흰 나비 한 마리가 얇은 날개를 쉼 없이 팔랑거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태연하고 단순한 몸짓으로.
당시에 재경은 흰 나비의 날개짓에서 무겁고 절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덧없는 동시에 연약하고 아름다워서 오랫동안 그녀의 기억 속에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오늘 공원에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호수를 끼고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서 계속 걸었다. 하늘에는 미농지를 덧댄 듯 반투명한 구름이 엷게 깔려 있었다. 맞은편에서 목줄을 한 갈색 리트리버가 경쾌한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열 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와 그애의 부모도 함께였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단상이었다.
개. 재경은 자연스레 토리를 떠올렸다. 토리는 유기견 보호소에 있던 대형 믹스견이었다. 바로 지난주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가 소장님으로부터 토리가 도망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봉사자들 중 누군가가 실수로 출입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 잊고 안으로 들어온 순간에, 마침 모종의 이유로 견사 밖으로 나와 있던 토리가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는 것이다. 보호소 뒤편의 야산을 향해서.
“봉사 온 애들이랑 산을 온통 뒤지고 근방에 전단지도 돌렸는데, 결국 못 찾았어.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야.”
재경은 소장님을 따라서 비어 있는 견사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토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토리는 어떻게 됐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몇 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려봤지만, 그 어느 것도 긍정적인 전망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탈주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에, 토리는 해방감을 만끽했을까? 철창 안에 갇혀 보냈던 시간들이 몹시도 답답했을 텐데. 그렇다면 토리가 불행한 선택을 했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놓아두기로 하자.
유기견들. 재경이 방문했던 보호소만 하더라도 대략 90여 마리의 개들이 상주해 있었다. 그 개들과 방금 전에 공원 산책로에서 그녀를 스쳐간 리트리버 사이에는 종의 차이를 넘어서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소유권자가 유기를 결정한 순간에, 운명이 엇갈려버렸을 뿐이었다. 약하다는 건 결정적인 상황에서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누구에게나 슬프고 화가 나는 일이었다.
……여덟 살 무렵에 재경은 병아리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하굣길에 학교 정문 앞에서 커다란 박스 안에 담겨 울고 있던 노랗고 앙증맞은 생명체를 집으로 데려와, 아파트 8층 높이에서 떨어뜨렸던 것이다. 고작 어머니에게 발각되는 게 두렵다는 이유에서. 아이는 겁이 많고, 무지했으며, 그래서 잔혹했다.
문득 재경은 고개를 돌려 호숫가 쪽을 바라보았다. 펜스 가까이 다가서자 수변에는 겨우 내 바람에 몸이 납작하게 기울어진 갈대 무더기와 더불어 찌그러진 캔, 내용물이 3분에 1쯤 남아 있는 젤리 봉지 따위가 흩어져 있었다. 호수의 물빛이 흐렸다.
그녀는 호수 밑바닥에 병아리의 사체가 가라앉아 있다고 상상해봤다. 거기에는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진, 피에 젖은 작은 몸뚱이가.
그날 아이는 한 번이라도 아파트 화단에 내려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밤이 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꿈이 없는 잠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꿈 없는 잠이라니. 일을 그만 둔 뒤로 그녀는 한동안 악몽을 자주 꾸었다. 공간적 배경은 주로 학교였다. 그곳에는 교과서와 학습지 뭉치와 백묵이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손에 든 채로 사각형과 사각형과 사각형과 사각형의 타일들로 이루어진 좁고 기다란 복도를 배회해보지만, 문이 굳건하게 닫힌 교실들 사이에서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만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그림자처럼 저물어가고 있었다.
왜
그녀는 교사의 편도, 학생의 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편도 아니었다.
왜
그녀는 어른을 미워하는 어른이었다.
왜
[벽] 너는 실수투성이에 충동적이야. 도대체가 왜 그렇게 쓸 데 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 거니? 헛꿈 꾸지 마. 애초에 너에게 작가가 될 만한 재능은 없으니까. 겨우 그 정도 일로 아프다고 우는 거야? 이런, 원래 사람은 힘들 때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야. 답답해. 네가 착한데 멍청해서. 아니, 멍청하니까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병신 같은 게. 네 생각과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왜냐고?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너를 믿을 수 없어. [벽]
재경이 벽을 세운 건 본능의 발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내‧외부의 목소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이 세운 경계. 그녀는 일찍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몰라서’ 혹은 ‘어쩔 수 없어서’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굴거나 상처 주었던 순간들에 대한 가책도,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인 목소리에 대한 두려움도, 원망과 분노도, 외로움도 ‘좋은 사람’인 재경의 몫은 아니었기에, 벽 안쪽에 밀어 넣은 채로 영영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러나,
환상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 번 무너지고 난 뒤에야 알게 됐다. 벽 안쪽에 마구잡이로 쌓아두었던 목소리들이 경계를 뚫고 벽 바깥의 세계에까지 범람했을 때, 그녀는 ‘무력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사람이 무기력한 상태에 놓이는 것은 더는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할 수 없다고 느낄 때이다.
마침내 재경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려나, 직장에서도 도망치듯이 튕겨져 나갔다.
그러니까, 벽 안쪽에 갇힌 대상은 처음부터 목소리가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바다. 이따금씩 호수 밑바닥의 상념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칠 때면 재경은 차를 몰고 육지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카페들 가운데서 적당한 가게를 골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한 뒤에 모래사장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마치 바다가 모래사장을 향해 백색 거품을 끊임없이 밀어내듯이 시간 속에 일렁이는 감정들을 흘려보냈다.
그곳에서는 한낮의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잠시 벗어나, 푸른빛을 다채롭게 머금은 바다의 물결과 수평선 너머 펼쳐진 하늘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도록 바다를 동경해온 호수처럼.
흠뻑 바다에 몸을 적시고 싶었다.
그림자. 재경은 호수에서 멀어져 다시 산책로 위로 걸음을 옮겼다. 구름이 조금 물러난 사이로 드러난 햇빛에 물상의 빛깔이 한층 환해져서, 그만큼 그림자의 음영도 짙어졌다.
종종 상상하곤 했다. 만일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주인의 정서를 반영하여 특정한 질감과 색채를 드러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바로 직전에 그녀의 곁을 기세 좋게 달려서 지나쳐간 중년 여자의 그림자는 산뜻한 주황색, 저쪽에서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걸어오는 청년의 그림자는 진득하고 어두운 회색, 수변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커플의 그림자는 초록색과 벚꽃을 닮은 분홍색, 이런 식으로.
오늘 재경의 그림자는 유화 물감을 꾸덕하게 덧칠한 것 같은 노란색에 가까웠지만, 불과 어제만 해도 회색빛이 도는 하늘색이었다. 또 언젠가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죽박죽 혼합된 색의 그림자를 위태롭게 끌고 다닌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보면 한 시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조망해 봐도, 한 사람에게서 여러 시점을 들여다봐도 그림자의 형상이 동일한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 재경에게는 중요했다. 또 어떤 경우에도 그림자는 제 주인의 형상만을 반영한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달리기. 과거에 그녀는 딱히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편에 가까웠다. 단순하게, 딱히 달려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분이 동할 때면 단순히 달리고 싶어서 공원을 찾기도 했다. 주로 날이 아주 좋을 때나 반대로 침울한 감정이 한동안 지속되어 그림자에 잠식돼버릴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원래 재경이 달리기를 시작한 계기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려면 꾸준히 글을 쓰는 태도를 갖추어야 했으며,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서는 꾸준히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목표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공원에 나가서 ‘런데이’라는 앱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따라 30분 달리기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8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지만, 마지막 스탬프를 찍기까지 자그마치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토대를 만드는 데 걸린 기간이었다.
그 사이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다니며 약을 복용했고, 매주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심리 센터에서 주관하는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그녀가 유기견 보호소를 찾게 된 것도 독서모임을 통해서였다.
글쓰기. 재경이 작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 그러니까 교사가 되기 한참 전부터였다. 그 꿈은 현실의 필요나 누군가의 기대가 아닌 재경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피어난 열망이었기에, 그녀가 자기 자신을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더욱 간절한 것이 되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녀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성취를 넘어 현실의 크고 작은 좌절들 속에서도 삶을 창조하며 자기를 실현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여정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자신이 아닌 누구에 대해서도 쓸 수 없었기에, 일기를 썼다.
- 나, 아무 것도 아니어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내면에서 쉴 새 없이 웅웅대는 목소리들을 향해, 그 목소리 너머에게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는 시선들을 향해, 자꾸만 그녀로 하여금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주저앉게 만드는 날선 혐오를 향해. 어떤 날에는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어떤 날에는 좌절감과 슬픔을, 또 다른 날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을 문장으로 옮겼다. 대부분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채 안에서만 맴돌던, 혹은 제 안에서조차 인정받을 수 없었던 말들이었기에 글을 쓰고 나면 자꾸만 허기가 졌다.
그럴 때 재경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략 두 가지 정도였다. 하나는 즉각적인 해결책으로 입안에 허겁지겁 무언가를 밀어 넣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필사였다. 필사를 하다보면 이따금씩 그녀의 허기를 깊은 곳에서 채워주는 문장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문장들은 내면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녀가 다시 글을 쓰고, 공원에 나가 달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사람들. 글을 쓰고, 정신분석을 받고, 모임과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조금씩 교류를 확장하면서 그녀는 그간 벽 안쪽에서 홀로 고립돼 왔던 내면의 외로움과 만났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놓았던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글쓰기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서사와 외로움의 결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 속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받고 세상을 경계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려 하고, 연민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을 나눴다. 덕분에 재경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자기 안에 세워진 벽을 바라보고, 분별하고, 해체하고,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그녀는 서재에서 안 에르보의 그림책 「파란 시간을 아세요?」의 도입부를 필사하던 중에 빗소리를 듣고는, 비를 흠뻑 맞으며 공원을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흙탕물처럼 고여 있던 감정들이 발산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원을 달리는 동안에 재경은 자신이 오랫동안 두려워마지 않았던 시선들과 마주했고, 그럼에도 괜찮다고 느낀 순간 그 시선들이 오래된 벽의 겹들과 함께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목표 지점인 호수의 끝에 거의 이르렀을 때쯤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빗속에서 그녀는 눈물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호수의 가장자리. 거기에는 호수의 양끝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었고,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호수 반대편의 낮은 지대에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잔디밭이 비밀스레 펼쳐져 있었다. 낮 시간대에는 자리가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재경이 지난 몇 년 동안 아지트처럼 여겨왔던 장소였다. 오늘은 이곳에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여자애가 먼저 와서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진한 얼굴로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재경은 아이가 마주 보이는 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이가 불어 올린 동그란 비눗방울이 빈 가지에 내려앉아 햇빛에 부서진 자리에서 연둣빛 싹이 돋아나는 상상을 했다.
문득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나무의 겨울도, 비눗방울 같은 환상도 외면하지 않는 이야기를.
얼마 뒤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하늘에 구름은 제법 걷힌 상태였고, 그 아래서 호수는 깊이를 감춘 채 잔잔한 빛과 그림자를 머금은 채로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재경이 지나온 산책로가 공원 입구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녀는 다리 가운데 섰다. 호수를 향해 양팔을 뻗어 가만히 손바닥을 위로 펼치자 그곳에서 흰 나비 한 마리가 떠올랐다. 이윽고 나비는 수면 위에 조그만 그림자를 띄우며 유유히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어느덧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재경은 자신의 시야에 비친 세계가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독자님들께 인사드립니다.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잠깐 제 근황을 조금 이야기하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계속 써 보겠습니다>는 아직 역량이 미치지 못해 연재 중단을 결정하게 됐지만
2023년부터 지속해왔던 글쓰기 모임을 통해 글을 계속 쓰고 있고, 현재는 모임에 참여해주시는 분들 가운데 몇몇 분들과 문집 제작을 진행중이에요~
출간되는 책은 아니지만, 모임원들과 쓰기의 과정을 함께 나누며 작은 결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무척 기쁘고 소중한 작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글 역시 문집에 포함시킬 예정인 글이구요..ㅎ)
예전에 비해 브런치에 자주 접속하진 않았지만, 고마웠던 분들의 근황을 확인하며 흠모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어나가고 있었어요ㅎㅎ
당분간 저는 브런치에서 제 보폭에 맞게 비정기적인 글 발행 방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안으로 역량을 더 쌓아 나가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중한 시간을 내어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모두 안녕한 하루 보내시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