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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마크 Oct 01. 2022

내 인생에 나타나 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에게

김혼비 작가 l 다정소감

다정 때문일지도


무미건조하게 쌓인 뉴스들 사이, 사람 냄새가 나는 기사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런 기사들의 댓글 창엔 항상 똑같은 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의외로 사람들은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 결과는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팍팍한 세상을 단번에 살만한 곳으로 바꿔버리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루를 버티며 내일을 또다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고 소중한 감정들이 쌓아 올린 ‘다정’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술로 만난 사이


좋아하는 것만 찾고, 보고, 읽는 습관 때문에 편협해진 나의 취향과 시각이 무서워진 어느 날.


내가 가장 싫어하고 관심 없던 ‘술’이라는 주제로 영역을 넓혀가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심의 순간에 김혼비 작가를 만났다.  


김혼비 작가의 영혼이 담긴 아무튼, 술(좌) / 술이 내는 소리에 대한 애찬으로 가득한 페이지(우)


<아무튼, 술>로 처음 만난 김혼비 작가는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한없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혼비 작가가 내 절친이라면? 그때부터는 내 삶이 약간(?) 피곤해 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제에는 일주일 내도록 술을 진탕 마신 작가와 작가의 주사를 매 순간 마주한다는 조건이 들어가야 성립되겠지만.


그 후, 술에 1도 관심 없던 내가 고작 책 한 권으로 술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내 인생사에 기록될 만큼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때, 이 세상 주류회사들이 모두 망했으면 좋겠다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내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밥 한 번같이 먹어본 적 없는 작가에게 ‘술’로 영업을 당했으니 말이다.



얼린 건 어쩌면 다정


“여름 동안 정성껏 얼려 가을에 내보낼 글들이 나의 산문집을 방문해 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잘 녹으면 좋겠다.”


작가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김혼비 작가의 영업력은 이번에도 통했다.


김혼비 작가가 얼린 글들은 마음속에 녹아 흘러넘치다 못해 한강을 이뤘고,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리는 다정한 문장들 속에 빠진 나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술맛도 모르는 내게 술자리를 염탐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깊숙이 숨겨두어 흐릿해진 기억 상자를 하나씩, 하나씩 꺼내게 했다.


작가가 써 내려간 다정에 대한 다짐과 소감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존재의 유무조차 희미해진 지날 날의 시간을 무장해제시켰고, 그날의 복잡 미묘했던 감정들마저 진하게 불러일으켰다.


고마웠던 마음에 코 끝이 시큰해졌다가도, 오만하고 같잖았던 과거의 내 모습을 마주할 때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다정소감을 읽다 보면 옹졸했던 나의 흑역사가 절로 생각난다. ©루리웹


자기반성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곱씹어 보는 시간.

나에게 다정소감은 그랬다.



김솔통과 사리곰탕면


다정소감은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감상이며, 다정에게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을 벽돌 삼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산문'집'이다.


마스크를 벗으면 비로소 볼 수 있는 사람의 표정 같다. ©BOOKMARK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 쓴다.”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다정이 사려 깊고, 그녀의 알파벳 친구 J가 꼬박 이틀 밤을 우려낸 사골 곰탕면은 감히 그 맛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다.


국물이 흘러들어오고 눈물이 흘러나가면서 내 눈에 옮아 있던 날 선 눈빛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J의 사리곰탕면이 새겨 넣은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누군가가 이틀을 꼬박 바쳐 요리한 음식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잊지 마.


나를 따라 눈물이 그렁그렁 해진 J와 함께 울며, 그리고 불며 싹 비워낸 한 그릇은 그렇게나 시원했다.

©다정소감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p210)


누군가를 위해서 마음을 내주고, 행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라서 친구라서 당연한 다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내 인생에 나타나 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에게


사회생활 쪼렙이었던 내가 역대급 진상 손님을 마주하며 쩔쩔맸던 무더운 여름날. 지나가던 나를 불러 앉혀 내 두 손을 꼭 잡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독여주었던 이름 모를 할머니.


불을 끄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던 숱한 20대의 밤. 그때마다 내 옆자리에서 god의 길을 불러주었던 친구.


지금도 여전히 흔들리고 길을 헤매고 잃는 30대이지만, 그때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의 근육을 가지게 된 것은 내 앞에 나타나 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그날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누군가에게 다정패턴 디자이너가 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자신에게 다정을 기꺼이 나눠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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