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의의 멸종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정의의 멸종

모든 시선은 단 한 사람에게 쏠렸고, 웃음도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끝내 그는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었다.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AFP 연합뉴스>


요 며칠,

세계는 정의의 멸종이라는 잔혹한 풍경을 마주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정의를 배웠고,

삶을 통해 또 다른 정의를 익혔으며,

사전과 철학,

동서양의 문헌을 통해 정의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어느 정의의 틀 안에서도,

정의 그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사전은 정의를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 간의 바른 의의”,

“사회를 유지하는 공정한 규범.”


철학은 더 정교하게 파고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일반적 정의’,

‘평균적 정의’, ‘배분적 정의’로 구분하며,

각 정의가 사회와 법,

윤리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논의했다.


동양의 정의는 ‘의(義)’로 표현된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품성과 사회적 책임,

관계 속의 정당함까지를 품는다.


서양의 Justice는

법과 판결의 기능을 중심으로 삼지만,

우리말 ‘정의’는 도덕과 사회,

개인의 양심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목격한 건

이 모든 정의의 언어가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명분은 사라졌고, 대의는 꺾였다.

힘의 언어만이 남았다.

강자의 말은 옳은 말이 되었고,

정의는 침묵했다.


한때 힘을 가졌던 대륙들과 나라들은

비루하게도 그 힘의 잔해에 매달려

오직 이익의 언어만을 되뇌고 있다.


강자가 곧 선한 것은 아니다.

약자가 곧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힘은 도구이지, 도덕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문득 페르메니데스의 문장을 떠올린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정의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정의가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둘 것인가.

침묵인가? 체념인가?

혹은 새로운 정의의 언어인가.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말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


하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정부.”

국적도, 권력도, 이해도 벗어난 단 하나의 조건.

사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 질문을,

나는 오늘 이 자리에 남기고 싶다.


“당신에게 정의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그 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비 내리는 날, 단조로움과 커피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