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창고
또라이의 철학, 자학의 미학
“그거 자학 아니냐?”
“또라이네 이거.”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속에서 꽤 진지한 철학을 느꼈다. 자학, 또라이. 우스워 보이는 이 두 단어는 생각보다 묵직하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웃고, 왜 누군가의 눈에는 ‘또라이’로 보일 만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자학은 단순한 자기혐오가 아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가장 고요하고 집요한 배움의 방식이다. 남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파고들어 배우는 것. 스스로를 다그치고 조롱하며 성장하는 방식. 타인의 동정을 기대하지 않고, 칭찬에 목마르지도 않은 배움. 그건 어쩌면 고통을 전제로 한 자율이다. 웃기지만 깊다.
또라이는 어떤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함을 주는 존재. 기준 바깥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는 사람. 때론 민폐로, 때론 경외의 대상으로 불리지만, 정작 그 사람은 자기의 방식으로 세상을 재편집하고 있다.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 그 자체가 이미 창조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걸 ‘창의’라고 부르고 싶다.
자학과 또라이. 이 둘은 서로를 닮았다. 기준을 파괴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자기 삶의 서사를 스스로 써 내려간다. 반 고흐가 그랬고, 프란츠 카프카가 그랬고, 당신 옆에 앉아있는 평범한 누군가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학이 좋다. 그건 누군가의 조언 없이 혼자 내면을 돌파한 흔적이니까. 또, 또라이도 좋다. 기준 바깥에서 살아가는 용기가 있으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멀쩡함이 아니라, 그런 용기다. 조금 비틀리고, 가끔 어긋나더라도,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용기. 타인의 기준보다 내 감각을 신뢰하는 용기.
결국 중요한 건 한 가지다.
당신은 자학 속에서 배우고 있는가?
또라이처럼 웃기지만 진지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새로 써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남이 짜준 각본 안에서만 무해하게 존재하는가?
웃으면서도 한 번쯤은 곱씹게 되는 질문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