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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버가드 Nov 04. 2021

위대한 일탈 (1) : 태동

책, 영화, 노래가 일으킨 반란

1995년 6월. 


당시 8살이었던 나는 선교사이신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 사할린으로 이민을 갔다. 사할린은 일본 윗쪽에 있는 섬으로,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라면 초콜릿 모양의 성으로 가득한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초콜릿 성은 없고 우중충한 날씨에 칙칙한 회색빛의 소련식 건물로 가득했다. 


당시 소련 해체 이후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근엄한 얼굴로 손가락질하는 레닌 동상. 왠지 다들 화가 난 듯한 사람들의 표정과 거친 어투. 소련식 흑백 교복을 입은 학생들. 맥도날드, 피자헛은 커녕 음식점 하나도 없는, 무늬만 도시였던 깡시골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허술했다. 


학교에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외국인을 처음 봤던 이유에서인지 학우들은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유없이 뺨을 때리며 도시락 가방에 담배를 넣고 내 물건을 훔쳤다. 선생님은 내가 왜 러시아어를 못하냐며 구박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난 꿀먹은 벙어리같이 애꿎은 주먹만 꼭 쥐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원래 밖에서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사고뭉치였던 나는 자연스레 집에 틀어박혀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동토의 한기는 내 마음도, 세상을 향한 내 눈빛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한 이후에도 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했다.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줄까봐 두려웠고, 그런 사람들로 가득할 것 같은 이 세상도 싫었다. 혼자 있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 유유자적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잘 몰랐다. 애초에 혼자였으니까.


그렇게 살던 어느 날, 군대 전역을 앞둔 무렵에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나카무라 마사토가 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이라는 책인데,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으로 ‘나는 왜 더 모험하지 않았을까’를 꼽았다. 

 

책을 완독한 나는 긴 생각에 잠겼다. 과연 죽을 때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삶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또 무엇일까. 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내 앞에 여러 문들이 놓여있었다. 바로 취업해서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으로 사는 문도 있고, 공부를 좀더 해서 커리어 하이를 노리는 문도 있었다. 어떠한 문도 정답은 없었다. 내 심장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본 영화에서의 문구가 내 마음에 재차 공명을 일으켰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에서 나온 문구였다. 



To see the world, (세상을 보고)

Things dangerous to come to,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To see behind walls, (벽을 허물고)

Draw closer, (더 가까이 다가가)

To find each other (서로를 알아가고)

and to feel. (느끼는 것)

That is the purpose of life.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순간, 얼어붙은 심장의 균열을 느꼈다. 무엇인지 모를, 처음 느껴보는 묘한 두근거림이었다. 미지의 세계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타고난 방콕러여서 외출 자체를 싫어했던 나였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어두운 내면과 폐쇄성은 익숙한 곳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난 변하고 싶었다. 지독히도 칙칙했던 과거, 현재, 미래에 종언을 고하고 싶었다. 그럴려면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날 가로막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반듯한 직장을 얻기를 바랬다. 당시 단기복무 학사장교는 전역 후 롯데,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 특채로 취직할 기회가 있었다. 나도 혹시 몰라 삼성에 지원서를 넣어두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고민했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내 집 마련하고 연금 넣고 은퇴하는 것이 정말 후회하지 않을 삶일까? 


그러다 또 우연히 '겨울왕국'이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공 엘사가 자신을 옥죄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게 되면서 부른 OST ‘Let it go’는 내 생각의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back anymore

Let it go, let it go

Turn away and slam the door

I don't care what they're going to say

Let the storm rage on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책, 영화와 노래는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나를 하나의 길로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으라고 했던 그 길보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길.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결국 이 길의 결말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지금껏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감정들이 날 휘감고 있었다. 도전. 열정. 희망. 꿈.


그렇게 나는 레일 위의 일생에서 감히 탈선해버렸다.

일생일대의 반란, 위대한 일탈의 서막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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