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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버가드 Nov 10. 2021

위대한 일탈 (2) : 고치

새장에서의 몸부림

어느 늦은 밤. 마우스를 쥔 내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클릭하면 나는 정말 떠나는 것이었다. 도쿄발 뉴질랜드행 환불불가 항공권을 구매하기 직전이었다.


전역 이후, 내 마음 속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야심차게 추진해온 ‘꿈’이었다.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풀기에 바빴던 나는 이제 여행 계획을 구체화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루트를 정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미리 청사진을 그려보는 과정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딸깍’


클릭과 함께 주사위는 던져졌다. 출국까지 약 4개월의 여유가 있었다. 1년간 장기여행이었기 때문에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제일 먼저 대형 세계지도와 가고 싶은 곳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다. 

벽에 다닥다닥 붙여놓은 나의 꿈

이 사진들은 한부씩 더 인쇄해서 소지하고 다녔다. 일이 힘들거나 꿈에 대한 추진력이 떨어질 때마다 가장 가고 싶었던 폴란드 풍등축제 사진을 꺼내 보면 금세 힘이 났다.

폴란드 포즈난 풍등축제에서 띄워진 수만 개의 풍등

오세아니아-남미-중미-북미-유럽 순으로 총 30개국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각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세계여행과 관련된 서적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가보고 싶은 곳은 어느 정도 정해졌고, 구체적인 경로 설정은 스투비플래너(www.stubbyplanner.com)의 여행플래너가 큰 도움이 되었다. 각 나라별 대략적인 체류기간을 월간 다이어리에 기록해보았다. 기준은 소도시 최소 2박3일, 대도시 최소 4박5일로 잡되, 방문할 곳이 많은 지역은 체류기간을 유동적으로 조절하기로 했다. 실제로 숙소까지 이동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많았고, 여독을 풀고 여러 군데 구경하는데 1박2일은 너무 촉박했다.


유동적인 일정 때문에 저렴하지만 정해진 틀에 따라야만 하는 원월드 세계일주 항공권은 나의 경우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오세아니아와 남미행 항공권만 예약해두었다. 남미에서는 가급적 육로로 이동하고, 여타 항공 이동이 필요한 구간은 현장에서 예매하기로 했다.


1년 장기여행용 배낭으로는 트래블메이트의 50리터 백팩이 제격이었다. 부피가 크지만, 1년 동안 필요한 물품을 소지하기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의류는 여름, 겨울옷을 같이 챙기되, 전천후 상황을 대비하여 고어텍스 경량 윈드자켓과 패딩, 털모자, 장갑 등 방한용품도 준비했다.


전자기기의 경우 최경량 노트북인 엘지 그램과 외장하드를 챙겼다. 가장 고민이 되었던 기기는 카메라였다. 장기여행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디지털카메라로 담기에는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최경량 DSLR 캐논 100D와 묵직하지만 성능이 더 좋은 니콘 D5300 중에 고심하다가 결국 니콘을 선택했다. 물론 카메라 무게 때문에 여행 중에 어깨가 빠지는 것 같았으나, 묵직한 DSLR을 챙기고 간 선택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E-book도 톡톡히 자기 몫을 했다. 그 안에 저장해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은 현지에서 빛을 발했다.


카메라 가방은 나중에 요리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식용유, 라면, 쌀, 스프가루, 소금과 후추 등 호스텔에 늦게 도착해서 마트에 갈 수 없는 상황일 때 유용한 것들을 언제나 챙기고 다녔다.

필요 없었던 물품으로는 여행 관련 참고서적이었는데, 읽지는 않고 쓸데없이 짐만 되어서 중도에 버리고 가야만 했다. 너무 많이 챙긴 마데카솔, 소독약 등 의약품들도 다행히 쓸 일이 없어서 결국 짐만 되었다. 하지만 물파스는 어딜 가나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모기가 우글우글한 아마존이나 운 안 좋게 걸린 베드버그 호스텔에서 빛을 발했다. 호기롭게 챙긴 침낭은 이불이 얇았던 아이슬란드 호스텔에서 딱 한번만 썼다. 가죽이 헤어진 낡고 작은 성경책도 같이 챙겼는데, 노느라 바빠서 응당한 대우를 해드리지 못했다.


해외에서 사용할 주력 카드는 해외은행 인출 수수료가 저렴한 시티은행 국제현금인출카드를 선택했다. 최근에는 시티은행이 소비자금융사업 철수 결정으로 이 카드 발급이 어렵게 되었으나, 하나은행 VIVA+ 체크카드 등 해외인출수수료 우대 카드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남미를 방문하려면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를 필참해야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접종을 받았는데, 그 다음날 알레르기가 심하게 일어나 전신에 발진이 일어나고 호흡곤란까지 왔다. 결국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가 주사 3방을 연거푸 맞고 링거를 꽂았다. 집에서 꼬박 3일을 누워서 지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온몸이 가려워서 밤에 잠을 못 잤고, 가려움을 해소하는 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으로 불면증이 와서 또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보니 일터에서는 또 졸기 일쑤였다. 며칠을 못자니 여행이고 뭐고 그냥 잠 좀 제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S대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예방접종으로 인해 이렇게 심한 알레르기가 발생한 사례는 드물어서 학회에 보고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2주 즈음 지나니 발진이 좀 가라앉는 기미를 보였지만, 발진 부위가 하얗게 일어나 무슨 허물을 벗는 것처럼 각질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것도 며칠 갔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았던 황열병 예방접종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지금까지 준비를 했지만, 중도에 여러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준비를 다하진 못했다. 예방접종 알레르기 때문에 크게 아팠던 와중에 슬럼프마저 찾아오는 바람에 의지가 한풀 꺾여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풍등축제도, 오로라도. 빛이 바래져 있었다. 괜한 모험을 자초한 것이 아닐까. 내 결정에 의구심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귀가하면 여행 준비대신 게임만 하기에 바빴다. 꿈을 갖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가야만 했다. 내가 변하려면, 이곳을 떠나야 했다.      


출국 전날,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여행 중 어떤 위험과 사고가 날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 작은 메시지는 남겨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비장하게 적어서 지금은 흑역사가 되었다. 그 내용의 일부를 공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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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여행을 계획할 때 동반되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 위험은 날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이 유언장은 내가 그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을 때에, 이 세상에 남겨진 분들을 위한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여행이 나의 첫 번째 꿈이었고 인생의 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도전에는 일정한 위험이 뒤따르는 법이고, 도전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결국 그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나 스스로 조심하고 어느 정도 운만 따라준다면 값진 모험을 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나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다 죽는 것은 값진 죽음이고, 후회없는 인생이라 자부할 수 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


남겨진 분들게 굉장히 죄송스럽고 특히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나의 재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가 임의로 판단하여 다음과 같이 분배한다. 사할린에 있는 내 베프 박 찌무르에게 와콤 타블렛을, 내 조카들에게 론리플래닛 가이드북과 유럽여행 바이블을... (중략)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꿈을 그리고, 도전하고, 성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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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이불킥감인 유언장을 비장한 마음으로 서랍 위에 살포시 두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1월 28일, 금요일. 대망의 출국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하는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앞뒤로 배낭을 메고 떠나기 전에 주무시는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삼촌은 현관문 앞에서 내 어깨를 잡고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기도해주셨다. 막상 집을 나오고나니 홀가분했다. 나는 이미 나를 내부에서부터 옭아매고 있던 것들로부터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과정은 알 수 없으나, 결국은 반드시 아름다울 긴 여행의 서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떨리는 발걸음, 그러나 올곧은 눈빛으로.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쥔 채, 심호흡을 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여, 나의 발걸음을 지키사, 주께서 지으신 세상을 제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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