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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Feb 26. 2024

운전 단상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2. 운전

아내와의 글쓰기 프로젝트 이번 주제는 '운전'이다.

기한을 착각해 약속한 마감일이 지났고

생각의 파편들을 한 편의 글로 꿰어낼 자신이 없어

이번 글은 '운전 단상'이라는 제목으로

생각의 조각들을 나열해야겠다는 꼼수를...



#1. "잘합니다!"


신입사원 시절, 직장생활 경험이 있었던

동기 형님이 조언을 해주었다.


"윗사람이 뭐 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잘한다고 대답하고 그다음에 고민해.

머뭇머뭇하고 자신 없어하면 다 마이너스야."


회사에 들어와 보니 신입사원이 운전을 못하면

선배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심부름도 못 보내, 출장도 혼자 못 보내,

어디 갈 때마다 모시고 다녀야 해...

더구나 현장에 나갈 일이 많은 직업 특성상

운전은 기본 중 기본이었다.


자리만 지키던 수습사원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이 승인도서 도청에 갖다 줘야 하는데

운전할 줄 알아요?"


승인도서 내용을 모르는 건 물론

도청이 어딘지도 모르고 (당시엔 내비가 없었다.)

면허시험 이후 운전을 해본 적도 없는 나였지만

선배의 조언이 떠올랐다.


"네! 운전 잘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깜깜했다.

지도로 도청 가는 길을 검색한 다음

'그까이꺼 해보지 뭐'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이씨, 와이퍼는 어떻게 켜는 거야!!

깜빡이에 쌍라이트에 아무거나 만지다 보니

와이퍼가 작동됐다.

문제는 차선변경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도 없어 감이 없는 데다

비까지 내려 사이드 미러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깜빡이를 넣어도 차들은 끼워줄 생각이 없었고

크락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상당한 민폐와 우여곡절 끝에

미션을 성공하고 돌아오니

또 다른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장님 모시고 운전하기'


단장님께서 약속 장소까지 태워줄 사람을 찾으셨고

선배들은 나를 운전병으로 지목했다.

단장님은 갓 들어온 신입의 운전 실력을 의심하셨다.


"운전할 줄 알아?"


이번에도 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잘합니다!"


나는 단장님께 여기서 기다리시라고 하고

주차되어 있던 차를 빼러 얼른 뛰어갔다.

 급한 마음에 얼른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그런데 앞으로 가야 할 차가 가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난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갑자기 꿀렁하더니 차가 후진을 하며

뒤에 있는 화단을 밟고 올라가 버렸다.

'우이씨, 뭐야 이거!'

확인해 보니 후진 기어가 들어가 있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단장님 앞에 정차했는데

단장님은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물으셨다.


"진짜 운전할 줄 알아?"


그때도 난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잘합니다!"


단장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차에 타셨다.

안전벨트를 매고 옆에 손잡이까지 꼭 잡으셨다.


"자, 지금부터 내가 '브레이크!' 하면

급브레이크를 밟는 거야. 알겠어?

'출발!' '브레이크!' '출발!' '브레이크!'"


몇 번의 예행연습을 마치고 겨우 출발했다.

나보다 단장님이 더 긴장하신 것 같았고

같이 가는 동안 단장님은 아무 말씀 없이

생명줄 같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계셨다.


지금의 내 운전실력과 배짱의 팔 할은 회사였다.

서투른 나를 훈련시키고 도전하게 만들고

사고가 나더라도 뒷일까지 책임져 줄 회사 덕분에

지금의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 운전 잘합니다!


나이를 먹으며 초심을 잃어가고 있다.

뭐든지 잘한다고 일단 질러놓고 시작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것보다는 해본 것, 아는 것, 아는 사람 위주로

현상유지 안전빵의 삶이 편하고 좋다고 느끼는 요즘.


서툴지만 앓음다웠던, 아름다웠던 청년시절을

떠올리며 도전 의지를 불태워 본다.

지금도 여전히 내겐 뒤를 지켜줄 회사가 있고

언제나 내 편인 아내가 있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그때보다 상황이 낫기에.

그러다 보면 또 언젠가 자신 있게 말할 날이 오겠지.


저, OO 잘합니다!



#2. 교통사고


20년이 넘는 운전 경력에

교통사고를 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출근길 4중 추돌사고에 난 세 번째였다.


바쁜 출근길, 파란불 신호에 대기하던 차들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빠져나가주는 것이

불문율인 사거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열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처럼

파란불 신호에 한 차라도 더 통과하려고

여느 때와 같이 따닥따닥 붙어 통과하던 도중

앞차가 급정거를 했다. "쿵, 쿵, 쿵..."


모두가 당연히 쭉 빠져줄 거라 믿던 길이었는데

앞 차가 배신을 때리고 옆 주유소에 가려고

갑자기 속도를 줄였던 것 같다.

내 인생 첫 차의 얼굴과 뒤통수가 다 망가졌다.

난 그 순간에도 지각했다는 사실과

무서운 부장님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신입사원의 군기가 있던 풋풋했던 시절이었다.


각 차주들의 보험회사 직원들이 현장에 왔다.

내 앞 차 주인은 자기가 먼저 박은 게 아니라

내가 박아서 밀려서 박은 거라고 주장했다.

그때는 블랙박스도 없던 시절이라

정황과 진술로 과실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충격을 느끼셨어요?

선생님이 박아서 앞차가 밀린 거 맞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내 보험사 직원이 나를 조용히 불러 얘기했다.

돌이켜보니 나도 차가 박아서 밀렸다고 해야

내 과실이 줄어든다는 취지의 코칭이었던 것 같은데

난 내가 몇 번 충격을 느꼈다고 해야 되는 건지

계산도 안 되고 그런 계산을 할 마음도 없었다.


난 내가 앞 차를 박은 게 맞고,

내가 박아서 밀린 건지는 내가 알 수 없고,

내 뒷 차가 앞 차까지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것 같다고

솔직한 내 느낌을 말했다.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사고 수습을 해주었고

그 일은 까맣게 잊은 채 5~6년이 지난 어느 날,

내 뒤차 운전자에게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문자를 받고 첫 문장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뭐야? 나한테 뭐 뜯어내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글을 쭉 읽어 나가며

의심부터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난 그분의 얼굴도,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도,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래도 그때 예의 바르게 처신을 잘했나 보다,

내가 잘 살았나 보다 하는 안도감과 자랑스러움,

내가 누군가에게 교통사고라는 안 좋은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뿌듯함,

몇 년이 지났는데도 스치는 인연을 잊지 않고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어르신을 보며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문자 한 통으로 내 삶을 인정받는 느낌,

앞으로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난 바로 답장을 보냈다.


교통사고 이후 벌써 15년이 지났다.

여전히 난 득실을 따지고 계산하는 데에 취약하다.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는 40대 철부지라

가진 것 없고 모은 돈 없어 가족에게 미안하고

내가 지금껏 뭐 하고 살았나 싶을 때도 많지만

죽을 날이 되어 내 삶을 정산할 때가 온다면

정량 평가에서 까먹은 점수,

정성 평가로 만회할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정성 평가에도 증빙자료가 필요할 수 있으니


저와 관련된 숨겨진 미담,
제보 부탁드립니다.



#3. 난 길치다


역시 글은 쓰다 보니 길어진다.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지만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글도, 인생도 어디로 흘러갈지 미리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늘 모르겠다.


내겐 운전도 마찬가지다.

심한 길치인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당최 큰 그림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운전은 잘만 한다.

회사 후배는 내가 주차하는 걸 볼 때마다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일할 때는 한 번도 못 보았던 눈빛...)

내가 언제든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건

모두 내비게이션 덕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회사에서 그나마 폐 안 끼치고 사람구실 하는 것도

부족한 나를 채워주고 가르침을 주는

동료들을 비롯한 주변 분들 덕분이고,

언제라도 나태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 준비가 된 내가

크게 엇나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것도

가족과 친구, 날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내게 경고음을 날려주고,

가끔 실수하고 삐딱선을 타더라도

괜찮다며 나에게 길을 알려주는 내비가 있기에

허술하고 모자란 길치는

오늘도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는다.


내게 내비가 있는 한
난 어디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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