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6. 달리기>
아내에게 '언젠가 프로젝트'의
다음 제시어를 물었지만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했다.
아내는 이 프로젝트를 독서모임 사람들과도
같이 하고 있고 멤버들이 돌아가며
제시어를 정해주고 있는데
다음 제시어를 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래... 다들 바쁘겠지~ 이제 시들해질 때도 됐지~
그런데 웬걸? 나만 빼고 진행이 되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깜빡 잊고 말을 못 했다며
이미 제시어 두 개로 글을 썼고,
이번 주에 새로운 제시어까지 나왔단다.
이런... 한참을 생각해야 겨우 한 편 쥐어짜는데
세 편이나 벼락치기를? 그냥 포기해?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달려보자!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이번 제시어는 '달리기'다.
'달리기'하면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내 또래 대부분의 남자들이 떠올릴 장면.
아직도 모르겠다고? 결정적 힌트 나갑니다.
'Bad case of loving you'
빙고!
영화 '친구'에서 교복 입고 뛰는 장면이다.
사실 이거 내가 원조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들도 차고 넘칠 듯)
고3 수능 백일 전이었다.
(영화 '친구'가 2001년에 나왔고
내가 98년에 고3이었으니 원조는 나다.)
수능 백일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우리는 수능 결의를 다진다는 명목으로
기숙사 탈출 거사를 계획했다.
친구 S는 동생에게 미리 미션을 부여했다.
잠자기 전 문 앞에 고기와 버너를 놓아달라고.
기숙사 취침시간. 우리는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걸리면 몽둥이찜질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짜릿한 거 아니겠어?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택시를 잡아타고 S네 집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간. S 집 불도 꺼져 있었다.
S는 집에 들어가 조용히 물건을 챙겨 나왔다.
제일 겉늙어 보이는 친구가 슈퍼에서 술을 샀다.
(그땐 지금처럼 민증 검사 같은 게 거의 없었다.)
우리는 근처 놀이터에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준비해 간 두건과 선글라스까지 쓰고
일탈의 분위기를 한층 업 시켰다.
상의를 탈의한 채 기념사진도 여러 컷 찍었다.
수능과 오늘의 일탈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었지만
우린 이 기세를 몰아 수능도 대박이 날 것 같았다.
버너를 다시 집에 갖다 놓으려고 S 집으로 향했다.
S는 집에 들어갔고 우린 S 집 앞 골목에서
S가 무사히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골목길로 한 젊은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뭐지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여자 혼자?
우리도 놀랐는데 여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여자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우리를 지나치며 S 앞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예쁘다, 예뻐~
S 집 옥상에서 보면 앞집이 보이겠는데?"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입만 살아 나불대는 동안 S가 나왔다.
S에게 방금 앞집에 젊은 여자가 들어갔는데
누구냐 물으니 앞집 형 여자친구가 온 것 같다며
직접 확인을 해보겠단다.
"야, 됐어. 그냥 가자. 시간 없어~"
원래 똘끼가 충만한 S였는데
술도 한잔 들어갔겠다, 여기가 홈그라운드겠다
S는 거침없이 다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이놈이 진짜 옥상에서 엿보려고 하나 올려다보니
2층에서 앞집과 연결된 통로를 넘어가고 있었다.
똘아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돌았을 줄은...
(앞집이랑 연결됐던 게 기억의 오류가 아닌지
그때 사진을 찾아봤는데 진짜 통로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집을 지었는지 지금도 신기하다.)
"야이 미친놈아! 빨리 내려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런 건가?
샤우팅 같은 속삭임을 다급하게 외쳤다.
똘끼 충만한 S가 뭔 짓을 벌일지 몰랐다.
S는 앞집 창문 틈으로 직접 엿볼 생각을 했던 거다.
똘아이가 확실했다.
그때, 적막을 뚫는 남자의 샤우팅이 들렸다.
어떤 개XX야!!!
머리털이 쭈뼛 서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튀어!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기 살기로 뛰었다.
안개 낀 밤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내가 이렇게 빠른 사람이었는 줄은 몰랐다.
"야, 따라오냐? 한번 봐봐~"
"니가 돌아봐!"
쫄보들은 앞만 보고 한참을 달렸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멈춰서 숨을 골랐다.
"와~ 진짜 죽을 뻔했네.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남의 집엔 왜 들어가?"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우린 숨을 고르며 막 웃어댔다.
그런데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탁...
"야, 망했다! 뛰어!"
어둠과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실루엣이 보였다.
남자는 욕을 하며 죽일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외쳤다.
"길 건너!"
우린 도로를 횡단했다.
"택시 타!"
마침 우리 앞에 선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그냥 가주세요! 빨리요!
나쁜 놈이 쫓아와요!"
아저씨는 니들이 나쁜 놈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술냄새는 풍기지, 머리에 두건도 썼지...
행색이 정상 범주를 넘어선 놈들의 닦달에
겁에 질린 아저씨는 일단 액셀을 밟았다.
돌아보니 남자가 택시 뒤에 바짝 붙어 뛰어오고 있었다.
"빨리요! 저희 잡히면 죽어요!"
이렇게 탈출에 성공하는 건가?
그런데... 이게 웬걸?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앗!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아저씨, 그냥 가요! 빨리요!"
앞 차가 버티고 있어 그냥 갈 수도 없는 상황.
뒤를 돌아보니 남자는 다 따라붙어 택시 문을 두드렸다.
"아이씨, 망했다. 문 잠가!"
남자는 택시 문이 열리지 않자 택시 앞을 가로막았다.
라이트에 비친 모습은 딱 성난 좀비였다.
여기서 나가면 죽는다...
근데 어떤 놈이 택시 타자고 했어?
"빨리 내려 이 새끼들아!
아저씨, 이 새끼들 다 도둑놈들이니까 빨리 문 열어요!
안 그러면 아저씨도 공범이야!
번호판 다 외웠으니까 빨리 열어!"
지금 생각해 보니 남자 혼자 기백이 대단했고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철두철미했다.
그 상황에서도 뒤에 택시를 잡아 추격까지 대비했다.
"이대로 경찰서로 가요!
뒤차 타고 따라갈 테니까!"
내려서 튈 것인가, 이대로 버틸 것인가...
우린 한 손으론 생명줄 같은 도어록을 누르고
한 손으론 얼굴을 가린 채 기사님께 빌었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라고, 제발 그냥 빨리 가달라고.
마지막까지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그 남자도, 경찰도, 부모님도 아닌 담임선생님이었다.
진짜 죽도록 맞을 수도 있겠구나...
남자와 대치하며 슬슬 임종을 준비하고 있을 때쯤
우리 눈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잠옷 바람으로 뛰어오신 S의 부모님이었다.
S의 동생이 버너와 고기를 준비하는 걸 보고
우리가 올 걸 알면서 모르는 척해주셨는데
밖에서 난 소동에 놀라서 뛰어오신 거였다.
S의 부모님이 남자를 잡고 진정시키는 걸 보고서야
우린 슬금슬금 택시에서 내렸다.
S 아버지가 내 아들이랑 친구들이다 말해도
흥분한 남자 귀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S가 용기내어 남자에게 말했다.
"저 앞집 살아요. 도둑 아니에요.
어떤 여자가 들어가길래 호기심에..."
아... 진짜 똘아이냐? 그 말은 또 왜...
남자도 뭐 캥기는 게 있는지 더 흥분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담임선생님께 맞기 전에
이 남자에게 먼저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사태 수습은 부모님께 맡기고 우린 다시 택시에 탔다.
일단 튀고 보자. 어떻게 되겠지...
택시 아저씨는 뭔 죄인지 우릴 또 태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택시비를 못 받아서 기다리신 듯...
이 분위기에 기숙사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까까진 기운이 좋았는데...
지금 이 기운으로는 수능 망칠 것 같은데...
이대로 돌아가긴 좀 그렇지 않냐?
노래방 갈까?
그땐 참 속없는 고딩이었다.
당시엔 12시 이후 노래방 영업은 불법이었다.
모 대학 앞에 가면 무전기를 든 삐끼가 있었고
그들을 통하면 갈 수 있는 지하 노래방이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놀고 내일 생각하자."
우린 실의에 빠진 S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며
새벽까지 신나게 놀고서야 기숙사로 복귀했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수능 100일 전 행사를 열었고
거기에 S의 어머니가 참석하셨다.
우린 어머니께 죄송하고 감사했다며 고개를 숙였고
어머니는 복잡 미묘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게 염화미소라는 건가...
벌써 26년이나 흘렀다.
그때랑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무섭다 진짜...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던
똘끼 충만한 S는 의사가 되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S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 사라지고
예측 가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
(그래도 난 절대 S에게 내 몸을 못 맡길 것 같다.)
나도, 친구들도 다들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
이젠 그때 S의 부모님처럼 애들이 사고 치면
짠 하고 나타나 수습해주고 감싸줄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사고 치고 달리던 아이가 있다.
내가 만약... 사고 칠 때면...
누가 날 커버해주지?
바로 여러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