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법의 밤 - 1
꿈을 꾸었다. 대부분의 꿈이 그렇듯, 꿈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꿈에서 몹시 슬펐고, 내내 울었던 것 같다. 일어났을 때, 베개가 축축했고, 울음이 남아 가슴이 헐떡였다.
아주 간혹 그런 꿈을 꿀 때가 있다. 꿈이 아니라 마치 또 다른 삶을 철저하게 살아낸 것처럼 생생한 꿈.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시 누운 채, 대체 어떤 꿈을 꾸었던 건지 떠올려보려 애썼다. 그러나 꿈의 시작과 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뚝 잘려나간 것처럼 실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결국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갔다. 불특정 다수의 손자국으로 얼룩 진 거울에는 짙은 피로와 채워지지 않은 수면으로 지친 얼굴이 허옇게 둥둥 떠있다.
찬물에 얼굴을 벅벅 문지르자 졸음의 여운이 빠르게 씻겨 내려간다. 어느새 꿈을 잊은 머릿속은 곧 오늘 일정으로 가득 찬다.
지금 씻고 출발하면 몇 시쯤 도착할까? 오늘은 몇 km를 걸어야 하더라? 어제 사둔 음식들은 어디 즈음 가다가 먹어 없앨까? 물을 얼마나 담아가지? 도착했을 때, 알베르게에 자리는 있을까? 거기 상태는 어떠려나……?
손목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30분 정도가 지나면, 페레그리노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여정을 떠날 것이다. 내가 있는 여기는 푸엔테 라 레이나다.
어젠 샛노란 해바라기가 흐드러진 너른 밭과 돌풍이 몰아치는 페르돈 고개를 넘어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4km 남짓을 걸었다. 어느덧 근육통과 장거리에 익숙해진 다리는 더 이상 별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다정한 정적에 휩싸인 마을이었다.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있었다. 나와 이수는 고민할 것 없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토마스 신부님은 해바라기 들판에서 헤어졌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성경을 읽으며 홀로 약식 미사를 드린 후 다시 걷겠다고 했다.
짐을 푼 뒤,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진희 남매를 또 만났다. 두 사람은 우리와 같은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진형은 낯빛이 더욱 나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팜플로나에서 붙인 물집 패드가 별 도움은 안 되는 모양이다.
숙소에서는 진희가 감자전을 부쳐 나와 이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절뚝거리는 진형을 발견한 한 스페인 여성이 우렁찬 톤으로 직접 고쳐주겠다며 나섰다. 그녀는 친구, 언니와 함께 순례길에 오른 사람으로 도중에 길에서 우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의자에 앉은 진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는 낯선 소년의 발을 스스럼없이 잡더니 무릎 위에 얹어놓고 정성껏 치료했다. 지저분함은 차치하고, 타인의 발임에도 닿는 손짓에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어지간히 아팠는지, 진형은 묵묵히 그녀에게 발을 맡겨두었다.
어느덧 그녀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치료를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형의 발을 치료한 후, 그녀는 누구의 발이건 어떤 발이건 상관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몰려든 사람들은 어딘가 경건한 얼굴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명씩 한결 나아진 고통에 감사하며 일어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행이라는 말을 건네며 어깨를 두드렸더랬다.
“누나, 뭐해요?”
칫솔을 입에 물고서 멍하니 어제 일을 회상하다가 이수의 부름에 깜짝 놀랐다.
“일어났어?”
“네.”
옆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는 이수의 얼굴도 나 못지않게 엉망이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음……”
“걷는 거 힘들어?”
이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괜찮아요. 그냥……”
그렇게 말하던 이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칫솔을 입에 물었다. 그는 원래도 적던 말수가 더욱 줄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말수가 늘 법도 한데, 희한하게 이수의 경우는 반대였다. 차라리 만났던 초반이 더 수다스럽게 느껴질 정도다(그때는 낯설다고 그나마의 사회생활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양치질까지 끝마친 나는 세면도구를 챙겨 침대로 돌아왔다. 옆 침대에서는 낯선 남자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여장을 꾸린 배낭을 메고서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남청의 새벽이 시야 가득 밀려든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이수다. 오늘도 아마 같이 걸을 모양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거의 벗어날 때쯤에는 사위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세계 어디나, 여름밤이 짧은 건 똑같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예요?” 이수가 묻는다.
“걸어봐야 알지. 너는 어디까지 갈 생각인데?”
“에스테야요.”
“꽤 멀잖아. 그렇게 서둘러 갈 필요가 있나?”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 갈 수 있을 만하니까 가지.”
“그래도 좀 천천히 가. 누가 쫓아오니?”
이수는 그저 웃고 말뿐이다.
우린 비슷한 시각에 출발한 페레그리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중이다. 게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고 , 모르는 얼굴도 있다. 마을을 채 빠져나가기 전, 여왕의 다리 위에서 우린 토마스 신부님을 만났다.
“다음 마을에서 주무신 줄 알았는데, 여기 계셨네요.”
“여기 해바라기 들판이 너무 좋아서 선뜻 떠날 수가 없더군요.”
다시 셋이 된 우리는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먼저 자리를 잡은 페레그리노 몇몇이 아침을 먹고 있다. 필립도, 내 위 침대를 쓰던 아가씨도, 스테파니아와 헤르만도 있다.
인사와 더불어 합석한 다음, 커피와 크로와상을 주문해 정신없이 먹었다. 어제저녁 감자전이며, 샐러드며, 참치를 얹은 바게트까지 먹었건만, 그래도 배가 고프다. 세 끼 꼬박은 물론이요, 간식까지 챙겨 먹으면서도 그런다. 한참 크로와상을 입에 뜯어 넣는데, 옆자리의 스테파니아가 말을 붙여온다.
“걷는 건 좀 어때?”
“좋아. 넌 짐이 줄었네?”
170cm를 훌쩍 넘는 모델 체형의 스테파니아는 거의 제 상체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걸었다. 언젠가 한 번 본 그녀의 배낭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심지어는 집에서 쓰던 애착 베개(…)도 있었다. 그랬던 배낭의 크기가 전에 비해 1/3이 줄었다.
“도저히 그대로 들고 걸을 수가 없어서. 발목에 무리가 가더라고. 피레네 넘을 때 뭔가 잘못된 모양이야. 애당초 집에서부터 가지고 나오지 말았어야 할 물건들이 너무 많았어.”
“잘했네.“
스테파니아가 내 짐을 보며 물었다.
“네 집은 여전하네?”
“아니야. 나도 오다가 좀 처분했어.”
“거기서 뭘 더 처분해? 거의 비었던데.”
“그래도 필요한 건 다 있어.”
“너무 적다.”
“나한테는 충분해. 아마 네 짐도 또 뒤져보면 버릴 게 나올 걸.”
스테파니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젠 정말 필요한 것 밖에 없어.”
배낭을 바꿔 멘다면 그 짐에서 다시 1/3은 거뜬히 처분할 수 있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이 정도의 짐만 가지고도 불편 없이 여행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으니까.
집을 막 떠나온 사람은 무척 많은 ‘혹시나’를 대비한다. 낯선 것들에 온통 둘러 싸이니, 두려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무수한 변수가 곳곳에 도사린 여행에서 우리가 대비한 ‘혹시나’는 대체로 쓸모를 잃은 현실과 머잖아 맞닥뜨린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필요한 것은 당황하더라도 곧 수습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뿐이다. 그 마음만 다져지면, 길은 어떻게든 찾아진다.
길은 진흙탕이다. 밤새 보슬비라도 내린 걸까? 일대가 습하다.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마다 작은 마을들, 포도와 올리브가 영그는 밭들이 앞장선다. 나는 풍경들을 벗 삼아 걷는다.
에스테야는 산골짜기 틈바구니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초입 길가로 긴 강이 흐른다. 하늘과 산이 그대로 비치는 울창한 녹색 강이다.
나는 중간부터 혼자 걸었다. 내 속도가 이수나 신부님에 비해 많이 느려서 결국 그들을 먼저 보냈다. 애초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걸을 생각도 없었고, 저들의 보폭에 맞추려 무리하다 보면 내 무릎이 먼저 나갈 것 같았다.
마을로 진입하여 성당을 지나 알베르게 앞에 이르니 오후 3시다. 알베르게의 주인인 나이 지긋한 노인은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꾹 찍어 돌려주며 오늘 내가 묵을 도미토리로 안내한다. 도미토리 안에는 먼저 도착한 동양인 남녀 둘이 한참 여장을 푸는 중이다. 노인은 그 방에 날 덩그마니 떨궈놓더니 스페인어로 무어라 무어라 하곤 뒤돌아 간다.
방 안의 두 남녀는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여자는 극동아인처럼 보이는데,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걷느라 지쳐서 활기차게 인사를 나누고 어쩌고 할 기운이 없던 나는 일단 고개 인사만 하곤 밖으로 나왔다. 일행이 없으니 점심 겸 저녁은 혼자 먹어야 할 것이다.
모처럼 한가한 샤워실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씻은 후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보통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시간은 시에스타 즈음이라 마을은 늘 조용한 편이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마을 외곽의 성당 근처에 있어서, 사람 사는 기척을 느끼려면 안쪽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나는 휘적휘적 이곳저곳을 걸으며 문 닫은 상점의 진열장을 구경하거나 예쁜 거리가 보이면 냉큼 들어가 방향감각이 고장 난 꿀벌처럼 그 거리를 왔다 갔다 거닐었다.
시에스타가 끝나갈 즈음, 문을 연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농익은 과일의 단내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곡물과 과일, 채소, 각종 햄, 치즈, 와인까지 팔지 않는 식재료가 없다. 가게 주인이 떠오르는 대로 ‘이것도 필요해. 아, 저것도 필요하지. 이것저것이 있다면, 그것은 빠질 수 없지!’ 이러면서 채워둔 물건들 같다.
뭘 먹을까, 와인 한 병을 살까 말까 고민하며 진열대를 둘러본다. 그때 가게 안으로 두 명의 손님이 들어온다. 알베르게에서 같은 도미토리를 쓰게 된 그 두 동양인이다. 그들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물건들을 꼼꼼히 고른다. 과일이나 채소를 살피는 모양새가 제법 익숙한 것이, 둘이서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분위기를 풍긴다.
두 사람 모두 나와 비슷한 또래 같은데, 설마 부부일까? 아니면 커플? 이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사과를 생각 없이 집어 들고 고개를 들다가 여자 쪽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쑥스러워하면서도 몹시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 사과는 신선하지 않아요. 다른 걸 고르도록 하세요.”
… 같은 객실을 쓰는 만큼 오늘 중으로 말은 트겠다 싶었지만, 첫마디가 사과 이야기가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