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법의 밤 - 2
여자의 이름은 ‘바오’. 남자의 이름은 ‘당’으로 둘은 약혼한 커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약혼 기념 여행이란다. 두 사람 다 나와 동갑이며, 각기 약학과 의학을 전공하는 베트남계 덴마크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두 사람의 조부모 모두 덴마크로 이민을 왔고, 그 뒤로 쭉 그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고 있단다. 즉, 바오와 당은 이민 3세대인 것이다. 덴마크 인도 처음 만나고, 베트남인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다.
“재인은 혼자 여행 왔어?”
알베르게 공용 부엌에서 샐러드에 넣을 푸실리 면을 삶던 바오가 묻는다. 그녀 옆에선 당이 저녁 준비를 함께 하고 있다. 두 사람이 움직임은 앙상블처럼 매끄럽고 근사한 하모니를 이룬다. 나는 그들을 그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며 와인을 홀짝거렸다.
“응. 하지만 여기서 일행들이 생겼지.”
“그럼 다른 일행들은?”
“아마 먼저 도착해서 다들 식사하러 나간 것 같아.”
“헤어져서 다니는 거야?”
“그보다는 내 걷는 속도가 느려서 먼저들 가라고 했어.”
“아아.”
토마토와 양파를 모두 자른 당이 옥수수 통조림과 참치 통조림을 따서 체에 붓는다.
“넌 어디까지 가? 완주하나?”
“그럴 생각인데. 너희는?”
“우린 휴가가 짧아서 리온Leon까지 밖에 못가. 서두르면 조금 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쉽겠다.”
“나중에 또 휴가 내서 그때는 리온부터 걸으려고.”
이 커플 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정에 한계가 있는 순례자들은 구간을 나누어 걷는 경우가 많다.
요리는 빠르게 완성되었다. 우리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하나씩 들고 와인글라스를 쥔 채 마주 앉았다.
“그런데 나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도 돼? 난 옆에서 수다만 떨었지, 재료도 너희가 사고 조리도 너희가 다 했잖아. 이따가 설거지는 내가 할게.”
“무슨 소리야. 넌 우리 손님인데, 우리가 대접하는 건 당연하지.”
나는 딱히 의식하지 못했는데, 두 사람은 나를 그들만의 프라이빗한 식사에 나를 초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빈자리가 있으면 같이 어울려 먹거나, 마음 맞으면 같이 먹거나, 그냥 어쩌다 한 테이블을 쓰게 되어 어영부영 대화가 트여 같이 먹게 될 뿐이라고 여겼던 순례자들의 식사에 저토록 주체적인 느낌의 ‘초대’라니. 어쩐지 간지럽고도 다정한 표현이다.
그들이 날 위해 만들어준 저녁 요리는 파스타 샐러드다. 푸실리 면을 삶고, 양파와 참치, 통조림 옥수수 알갱이와 삶은 강낭콩, 블랙올리브 절임, 토마토를 넣고 섞은 다음 소금과 후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로 적당히 간을 해서 버무리면 끝이다. 간단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여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별로야?”
“장난해? 완전 맛있잖아!”
바오와 당이 뿌듯이 웃는 동안, 난 좋아하는 와인도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파스타 샐러드를 먹어치웠다. 그때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수가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요?”
“저녁 얻어. 이 친구들이 식사에 초대해줬거든요.”
“진짜요?”
이수의 눈이 동그래지며 바오와 당을 번갈아 본다.
“인사해. 내 일행.”
“반가워요.”
바오는 밝게 인사하며 내 옆에 앉은 이수에게 파스타를 덜어주었다. 꾸벅 고개 인사를 하더니 무덤덤하게 한 스푼 떠서 먹은 이수는 분명 저녁을 먹고 들어온 걸 텐데도 삽시간에 접시 하나를 뚝딱 비워 버렸다. 나는 그런 이수를 ‘네 맘 내 맘.’하는 표정으로 바라봐주었다.
“누나는 어딜 가든 굶어 죽진 않겠어요. 누나 혼자 밥을 어떻게 먹으려나 싶어서 토마스 신부님이랑 걱정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초대까지 받아 태연히 먹고 있으니 말이에요.”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던 이수가 말했다. (결국 바오와 당에게 바득바득 우겨 설거지는 나와 이수가 사수했다) 여행이 오래되어 혼밥이나 낯선 사람과의 식사가 어색하지 않게 된 나는 그냥 히죽 웃어 보였다.
바오에게서 샐러드 레시피를 얻어 방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잘 준비를 마친 후라, 침대 전용 미등을 제외하곤 전등은 꺼져 있었다.
“혼자 걷는 건 어때요?”
막 잠을 청하려는데, 옆 침대에 누운 이수가 묻는다. 이미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난 그를 향해 돌아누워 혼자 걷기가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지루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던데.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기도 하고. 온갖 잡다한 생각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이수가 뒤척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나도 혼자 걸을까 봐요.”
“해봐. 난 좋았어. 오늘 하루 걸었을 뿐이지만.”
“……”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반듯이 누웠다.
“내일 아침에 보자.”
“……”
이수는 답하지 않았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진 않지만, 생각이 무척 많은 모양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생각이고 뭐고,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닷새에 걸쳐 토레스 델 리오Toress del Rio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로그로뇨Logrono, 나헤라Najera를 지나 그라뇽Granon에 이르렀다. 화창한 하늘 저편으로 샛노란 해바라기 밭이 너르게 펼쳐져 있다. 길은 어디까지로든 끝없이 이어진다.
혼자 걸을까 하던 이수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이수와 나, 토마스 신부님은 걷다가 지치면 맥주를 마셨고(당연히 진형은 주스나 탄산수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서 더 걷기 싫어지면 거기서 멈추었다.
진희 남매와는 에스테야Estelle에서 헤어졌다. 잠시 호전되는가 싶던 진형의 발은 괜찮아지는 줄 알고 무리했다가 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됐다. 결국 병원에 가지 않고서는 해결이 안 될 수준에 이르러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에스테야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길에서 마주치는 얼굴들도 고정되었다. 필립, 스테파니아, 영국 출신의 마틴과 새뮤얼, 스위스의 노인 데이비드, 헤르만,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프랑스의 세 가족이 그들이다.
프랑스에서 온 가족 중 아버지는 고대 바이킹 전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어머니는 그다지 어딘지 병약한 인상을 풍겼다(아마도 옆에 선 남편의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홉 살 난 딸 다니엘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천사다.
가족 모두 영어를 하지 않아서 대화는 무리였다. 그러나 밤마다 잘 자라며 우리의 양 뺨에 비쥬 인사를 하는 다니엘의 천진난만함을 사랑하게 되는 데엔, 언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우린 길에서 다니엘 가족을 만나면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함께 앉아서 쉬었다.
로그로뇨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알베르게의 앞마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조촐한 미사가 있던 날이었다. 이때만큼은 종교와 상관없이 (나를 포함한) 순례자 대부분이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가 열리는 앞마당에는 온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죄다 모여 있었다. 식당엔 페레그리노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푸짐한 카나페와 각종 핑거푸드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미사가 끝나자, 마당엔 긴 테이블들이 놓였고, 사람들은 서로 도와 식당의 음식을 날랐다. 로비엔 와인 상자가 하염없이 늘어섰다.
와인 파티가 시작되자, 음악이 연주되고, 사람들은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우러져 한껏 떠들고 신나게 웃었다.
어느 자그마한 할머니는 날 보곤 장하다는 듯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셨다. 난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입술을 통해 음표처럼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축복의 말임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축복이 끝나고,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밤이 늦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귀가한 뒤엔, 페레그리노들만의 연회가 이어졌다. 우린 정말이지 쉬지 않고 먹고 마셨다. 큼지막한 칠리에 속을 넣고 튀긴 요리는 내 입에 딱 맞았다.
난 들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다시 채워지는 마법의 와인글라스를 쥐고, 다른 손엔 칠리 튀김과 카나페를 번갈아 쥐며 사방을 싸돌아다녔다. 라라소아나에서 만났던 미구엘과는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직장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는 곧 휴가를 내서 다시 올 계획이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와인과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이 플라멩코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뜬금없이 등장한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연주가 파티의 흥을 한껏 돋운다. 박자에 맞춘 박수소리, 웃음과 노랫소리가 마당을 가득 메운다.
와인에 취해 휘청대는 바오에게 플라멩코를 가르치던 젊은 스페인 여성 둘은 번갈아 그녀의 뺨에 친애의 키스를 퍼붓는다.
알베르게 구석구석, 축복과 사랑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문득 오늘 만이 아니라 모든 하루가 전부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침이면 당연하다는 듯 떠오르는 태양도, 우연이건 필연이건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그윽한 밤과 청명한 새벽의 공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최고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