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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Dec 11.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3. 메세타의 나비 - 5



베르시아노스 델 카미노Bercianos del camino를 2km 앞두고, 나는 바오 커플을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났다고 할까, 그들에게 주워졌다고 할까.

잔뜩 지쳐 나무 그늘 밑에 쉬다가 꾸벅꾸벅 졸던 나를 바오 커플이 먼저 발견하고 다가왔다. 희한하게도 당과 바오는 내 컨디션이 최악일 때에만 시기적절하게 잘도 마주쳤다.


남은 2km를 걸으면서 결국 몸 상태는 최저점을 찍었다. 알베르게까지의 마지막 300m 정도는 네 발로 기다시피 걸었던 것 같다. 이 길을 걸으며 목숨을 잃었다던 옛 순례자들의 무덤이 더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숙소에 도착한 직후 내 상태부터 확인했다. 물은 충분히 마셨느냐, 과일은 먹었느냐, 식사는 어떻게 했느냐 까지 쉬지 않고 물었다. 대꾸해놓고 보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어, 바오는 무모한 짓 좀 말라고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당은 물과 과일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저녁에는 라구 소스를 듬뿍 넣은 라구 파스타를 만들어 접시 하나 가득 몇 번이나 퍼 담아 먹게 했다. 이 두 사람은 혹시 내가 둥지에서 낙오한 날개 부러진 새끼 새인 줄 아나 싶을 정도였다.  


사실 나에게 가장 큰 휴식이자 에너지가 된 것은 둘의 존재 자체였다.

이 커플이 주고받는 애정은 평온하고 단단하다. 남녀의 열정, 형제 같은 우애, 모성애와 부성애, 친구 사이의 신뢰, 심지어는 낯선 타인에게 베푸는 조건 없는 친절까지. 이 모든 애정의 형태가 한 관계 안에 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볼 때마다 놀랍다.


알베르게 세탁실 의자에 앉아, 나는 신부님께 얻은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발가락 물집에 꿰어 넣었다. 이건 순례를 시작할 즈음 토마스 신부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통증과 별다른 감염 없이 물집 속의 수분을 빼낼 수 있다(물론 바늘을 라이터로 한 번 달구어 소독해주는 편이 더 좋다).


발바닥의 물집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숙소에 도착하면 신발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녀야 한다. 도대체 이런 발로 어떻게 다음 날이면 또 걸을 수가 있는지, 내 몸이면서도 불가사의하다.


바오는 내 민간요법(?)이 징그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엄지발가락에 생긴 두 번째 물집에다 실을 꿰며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만났어?”


바오는 내 발가락을 요리조리 살피며 대답한다.


“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거든.”

“친구에서 연인이 된 거야?”


바오가 빙긋이 웃는다.


“당이 날 먼저 좋아해 주었지. 나는 그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거든. 게다가 내내 남자로 보이지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리 보일 순 없잖아.”

“그런데 어쩌다?”

“딱히 계기는 없었어. 봐서 알겠지만, 당이 드라마틱한 성격은 아니잖아. 그냥……, 그때 사랑하던 사람 때문이 내가 많이 힘들었어. 사귀지는 않았고 데이트 단계였는데, 상대의 마음이 나 같지가 않았거든. 그러던 와중에 당이 꾸준히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게 해 주니까 마음이 흔들렸지. 결국 방아쇠를 당긴 건 나였어. 당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가 적극적으로 대시해오지 않으니까 나도 닥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더라고. 그래서 한번 시험을 했지.”

“시험?”

“응.”


바오의 눈동자가 그날의 일을 회상하듯 허공을 더듬는다.


“그날 나는 일부러 약속을 두 개 잡았어. 같은 시간에. 하나는 그 남자와, 하나는 당과. 그리고 당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했지. 너와의 약속을 깨고, 그 남자에게 가겠다고. 당은 처음엔 별 반응 없이 알겠다고 했어. 나는 결국 당의 마음도 거기까지일 뿐인가 싶어 실망했지. 그런데 1시간 정도 지나서 당이 전화를 한 거야. 나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어. 정말 굉장했다니까.”

“뭐라고 화를 냈는데?”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기꺼이 보내주려고 마음먹었으나,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서 안 되겠대. 그러면서 당장 자신에게 오라고 다섯 살짜리 같이 생떼를 쓰더라고.”

“저 당이?”

“저 당이.”


우리 둘은 마주 보고 히히 웃었다.

당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바오의 눈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에는 만지면 손에 묻어날 듯한 진한 행복이 배어 있었다. 그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또 서로에게서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메세타의 종장(終場)인 리온Leon을 향해 가는 새벽마다,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몸은 항상 어느 정도 지쳐있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힘이 나고 여간해선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나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했는데, 정확히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느 때보다도 맑게 갠 머리로 조금쯤 흥분해 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인가를 통과해 걸을 때면, 마치 퍼레이드 행렬에서 뛰쳐나와 텅 빈 도시를 쿵쾅쿵쾅 활보하는 코끼리가 된 기분이다.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 언젠가부터 전혀 열어보지 않던 노트북을 다시 켜기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머릿속은 대홍수 상태다. 말이 고갈되었던 내 안에 언어의 폭우가 쏟아진다. 사고의 강이 범람하며 가물었던 여백으로 새로운 언어들을 퍼 나른다.


여백으로 빠르게 스며든 언어들은 어떤 신념의 싹을 틔우고, 어떤 이야기의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점차 강의 수위가 안정을 되찾고, 황폐하던 땅에 색이 돋아나면, 그제야 나는 그곳의 풍경을 아주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물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큰 강으로, 그 모든 강을 포용할 바다로 흘러갈 길들을.




시뻘건 불의 혓바닥을 물끄러미 본다.

불은 흰 종이를 야금야금 갉으며, 시커먼 재를 뱉어낸다. 날름대는 불길이 춤을 춘다.


태우고 있는 것은 석 장의 종이다. 나는 리온에서 그 종이에 긴 글을 썼다. 누구를 위한,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그저 토해내는 글이었다. 두서도 없고 개연이나 일관 따위는 애당초 고려되지 않은.

까마득히 오랫동안 쟁여두고 잊어버린 불필요. 나의 찌꺼기. 내 안을 지저분하게 떠다니던 착각과 오만과 불신의 앙금들. 닥치는 대로의 과거…….


나는 아스트로가Astroga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앉아 그것들의 화장(火葬)을 마쳤다. 남은 불씨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는 재를 모래와 섞어 덮었다. 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멀리 아스트로가가 내려다보인다. 아스트로가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곳에 올라선 순간, 나는 그 석 장의 종이를 이곳에 묻고 가기로 결심했다.


바오와 당과는 리온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공원의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회전그네를 타는 당을 놓아두고, 나와 바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마친 뒤엔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당이 태워준 회전그네뿐이다.


리온에서 아스트로가까지 거리는 55km 남짓. 평소 20km 정도에서 한계를 느끼던 나는 이제 없다. 아스트로가를 불과 몇 km 앞두고 있으면서도 피로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진다.  감각과 인식 사이로 유쾌한 무중력이 관통한다.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무르익은 오후다. 오후의 공기는 온통 해바라기 색이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고 나서부턴 쭉 평지다. 아스트로가로 이어지는 길목의 조그만 변두리 마을로 들어섰다. 시에스타에 잠긴 마을 한 귀퉁이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얼음과 시럽을 넣어 굳힌 아이스바를 한 개 사서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내 옆에 앉아 졸린 듯 하품을 하곤 다시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아이스바를 다 먹은 후에는 남은 길을 마저 걸으려 일어섰다. 지금 상태라면 아스트로가보다 더 멀리, 앞으로 10Km는 더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간,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잠은 편히 자야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아스트로가 초입에 입성했다. 지그재그로 가팔라지는 경사를 걸어올라 노란 화살표를 따라간 끝에, 성당 바로 옆에 지어진 알베르게를 발견했다. 늦은 오후라 대부분의 페레그리노들은 이미 씻고 낮잠을 자거나 뭔가를 먹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중이다.

마냥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알베르게를 발견하자마자 온몸이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다. 마치 나도 모르게 걸려 있던 모종의 마법이 이제 풀린 걸까?  


알베르게 자원봉사자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다. 활기찬 목소리로 날 맞이한 그녀는 방긋이 웃더니 오늘만 해도 벌써 동양인이 세 명 째라고 즐거워한다. 동양인? 신부님 일행과 헤어진 뒤로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남자 둘이던데,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남자 둘? 어떤 예감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평균 키에 안경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봉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애매하게 대꾸한다.


“그랬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자세히 못 봤어요.”

“혹시 그분들이 남긴 방명록을 볼 수 있나요?”

“물론이죠.”


나는 내 이름을 잽싸게 기입한 다음, 앞장을 훑어본다. 곧 영어로 쓰인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후지모토, 한이수>


기대도 하지 않았던 두 이름을 본 순간 뜻밖에도(!) 반가움이 가득 차오른다. 이미 한참 앞서 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는 사람들이에요!”

“어머, 그래요? 잘된 일이네.”


봉사자는 빙긋 웃더니 두 사람이 묵는 호실을 알려주었다.


“아까 중국 식당에 간다고 나가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가보도록 해요.”


나는 신이 나서 두 사람의 객실로 갔다. 그녀의 말대로 침대는 비어 있다. 대신 눈에 익은 신부님의 성경책이 침대 머리맡에 단정히 놓여있다. 그걸 보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스멀스멀 퍼진다. 그렇게나 떨어지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피곤은 이미 저만치 달아났다. 부리나케 씻은 나는, 프런트로 돌아가 중국식당의 위치를 물었다. 봉사자는 식당의 위치를 적은 약도를 주었다. 나는 약도를 들고 곧장 알베르게를 나섰다.


중국 식당을 찾느라 낯선 길에서 30분을 헤맸다. 길 건너편에 있는 간판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횡단보도를 다섯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아무래도 못 찾겠구나 싶어 낙심하고 돌아서려는 바로 그 찰나, 거짓말처럼 간판이 보였다. 분명 아까 전 확인했던 곳인데. 도깨비장난에라도 홀린 기분이다.


식당은 부르고스의 식당과 비슷하다. 알루미늄 냄새가 날 것 같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들을 뒤덮은 깨끗한 흰색 테이블보가 눈부시다. 손님은 없다. 벽에 붙은 한 곳을 제외하곤.


나는 손님이 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신부님의 얼굴이 보인다. 마주 보고 앉은 남자는 이수다. 이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신부님이 기척을 느끼고 내 쪽을 본다. 무감하던 그의 눈은 날 발견한 순간 의아한 빛을 띠었고, 곧 경악하다가, 놀람과 반가움으로 가득해졌다.


“재인 씨!”


그가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허벅지가 테이블에 걸려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나는 날듯이 걸어가 테이블 앞에 섰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린 이수가 입을 헤 벌린 채 날 본다. 난 가슴께와 목구멍이 자꾸 간질거려 그만 헤헤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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