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메세타의 나비 - 7
새벽 3시 반이 되자 눈이 번쩍 뜨인다. 이제 알람은 필요 없다. 알베르게 안은 코 고는 소리로 요란하다. 귀마개가 없었으면 과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싶다.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부리나케 씻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토마스 신부님과 이수도 이미 여정 준비를 마쳤다. 오늘 함께 걸어보기로 한 새로운 일행 들도다.
수도원 알베르게 밖은 낡고 으슥한 어둠에 잠겨 있다. 침대가 부족해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페레그리노들이 바닥이건 의자건 가리지 않고 누워 잠들어 있다. 우린 살금살금 걸어 밖으로 나왔다. 이 알베르게의 개방 시간은 새벽 6시 30분. 그런데도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개방 시간을 알고 있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나왔던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의아했다. 그러나 의문은 곧 풀렸다. 현관문을 굳이 잠가두지 않은 이유는 대문을 굳게도 걸어잠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보려 해도, 3미터에 가까운 돌담이 수도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혹시 개구멍 비슷한 거라도 없을까 싶어 마당을 샅샅이 뒤졌지만,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다.
수도원의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끝이 뾰족하고, 문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철창의 위아래 간격이 넓어 발을 딛고 오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지간해서는 넘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잠은 깼고, 여기서 3시간 가까이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때 빨래터 방향으로 갔던 신부님과 이수가 돌아왔다.
“저쪽에 사다리가 있어요. 어찌어찌 담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시도해 보겠어요?”
우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우린 벌떡 일어서서 신부님과 이수의 뒤를 따라갔다. 빨래터 옆의 화장실 벽에 두 개의 사다리가 세워져 있다.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종류다. 사다리를 벽에 세워 늘리자, 먼저 신부님이 올라선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수가 신부님에게 나머지 사다리를 건넨다. 사다리를 받아 든 신부님은 반대편에다 사다리를 설치했다.
이 상황이 황당하고도 우스워 계속 낄낄 웃었다. 아영이와 소민이, 심지어 현숙 언니까지도 어른들 몰래 장난치는 아이들 마냥 낯빛이 들떠 있다.
“누구 먼저 올라갈래요?”
“제가 먼저 할게요.”
이수가 먼저 자진해서 나선다. 그는 날랜 몸놀림으로 사다리를 건너가더니 금세 담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그 긴 기럭지로 훌렁훌렁 오락가락하는 걸 보니, 한없이 높은 담도 낮아 보인다. 다음은 나다. 한 발을 사다리에 걸치자, 다리가 후들거린다. 놀이기구가 곤두박질칠 때 느끼는 순간적인 공포로 손에서 힘이 빠진다. 신부님이 담 위에 걸터앉은 채로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 뒤는 쉽다. 담 꼭대기에 오른 즉시, 반대편 사다리에 발을 딛고 내려선다. 반대쪽 사다리는 이수가 단단히 잡고 있다.
담 너머의 바닥에 내려서자 벅찬 해방감이 가슴을 뻥 뚫는다. 감옥에서 탈출한 탈옥수처럼 호흡이 벅차오르고 뜬금없는 열기가 용솟음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쳐다보며 숨 죽여 웃느라 뱃가죽이 당긴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사다리를 모두 정리한 신부님이 담을 뛰어넘어왔다.
“자, 어서 갑시다!”
가로등이 밝혀진 길을 빠르게 걸은 우리는 수도원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마음껏 소리 내어 떠들었다.
“기가 막히네요. 애들도 아니고. 말려도 모자랄 신부님이 사람들을 담 넘자고 선동하다뇨.”
“못 말리겠군. 그 잠깐을 못 참고 일을 저지르다니. 다들 유치원생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든 우린 자신들이 한 짓을 어이없어하면서도, 모두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탈옥수 놀이의 흥분이 가셨을 때 즈음엔, 폰페라다를 벗어나 본격적인 카미노에 들어서 있었다.
길을 가던 도중, 나란히 걷던 이수가 불쑥 물었다.
“혼자 걷는 메세타는 어땠어요?”
뜬금없는 질문이라 의아해서 이수를 보았다. 이수는 날 보지 않고 정면에 시선을 둔 채다.
“좋았어요?”
난 그때의 일을 상기해 본다. 그걸 단순히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이수가 질문을 조금 바꾸었다.
“누나는 뭔가 느껴진 게 있던가요?”
그의 말투엔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기색이 어려 있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되묻기를 택했다.
“너는?”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는다.
“글쎄. 다들 메세타를 두고 명상의 길이니 철학의 길이니 해대는데, 나는 끔찍하게 더웠다는 거 빼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졌던 숱한 질문들도 여전히 해답 없이 그대로고.”
“무슨 질문이요?”
“그냥…… 미래도 대해서도 그렇고, 온갖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서……?”
말끝을 흐린 그는 잠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고 있었어요. 국사쌤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거든요.”
“선생님이?”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제가 대학에 진학할 즈음 순수미술을 전공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응원해 주신 분이셨어요. 다른 선생님들과 친구들, 부모님까지 모두가 반대를 하는데도요.”
현 건축학도가 과거에는 예술가를 꿈꿨다, 라…….
“고3 마지막 방학이었어요. 그동안 쌤은 산티아고 순례에 두 번째로 도전하셨죠. 첫 시도는 교사가 되기 훨씬 전, 젊은 시절이었는데 완주하지 못하고 부르고스Burgos 쯤에서 결국 포기하셨다고 해요. 도중에 부상을 입었다고 하셨던가? 아무튼, 뭐 그 비슷한 이유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후로 포기했던 나머지 길이 내내 마음이 걸리셨다나 봐요. 학교 방학만 되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스페인만 떠오르셨다면서요.”
이수는 문득 목이 타는지, 수통을 열고서 물을 벌컥 들이켰다.
“결국엔 다시 마음을 먹고 두 번째 시도를 하셨대요. 하지만 두 번째라고 해서 절대로 쉽진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즈음엔 나이도 어느 정도 드셨으니 체력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고, 날씨도 따라주지 않았던 거죠. 매일 걷기가 너무 힘들어서 순간순간 포기하고픈 마음이 울컥 솟구치곤 했다 하셨어요.”
“……”
“하지만 그런 생각만 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도하차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셨죠. 그리고 드디어 완주를 하고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실 수 있게 되었다면서 웃으시더라고요. 전 고교 졸업을 앞뒀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고요.”
“……”
내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우리가 만난 후 처음으로 이수가 자신에 관해 입을 연 것일 테다.
“그때 전 건축설계를 전공할지, 순수회화를 전공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중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세요. 외아들인 제가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한 다음 가업을 잇길 바라시죠. 솔직히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보장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그 이상으로 저는 순수 회화를 해보고 싶거든요. 하지만 그게 보장된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면서 까지 뛰어들 만한 재능이 내게 있는가, 재능과는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일이니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에 답을 못 찾고 있어요. 그것이 절 계속 어중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고요.”
화실의 이젤 앞과 아버지의 건축설계 사무소 인턴직을 오가는 사이, 이수는 더더욱 뭐가 뭔지 모르게 돼 버렸다고 했다. 이젤 앞에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인턴 업무를 할 때는 자꾸만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때문에 정신이 반쯤은 다른 곳에 팔려있기 일쑤였단다.
“이런 태도가 주변인들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잖아요. 결국 아버지도 화가 잔뜩 나셔서 그 따위로 민폐나 끼치려거든 사무실에 나오지 말라시더라고요. 그와 거의 똑같은 얘기를 화실 사람들에게서도 들었고요. 그 이후로 저는 답도 없는 슬럼프에 빠져버렸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죠.”
이수는 쓰디쓴 얼굴을 했다. 그의 고민에 섣불리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귀 기울였다.
“그렇게 제대해서 어영부영 반년 정도 지나서였나. 고교 동창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 국사쌤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뜬금없이 그분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났죠. ‘가게 될 길은, 결국 가게 된다.’ 이것이 국사쌤의 일화가 제게 남긴 인상이었거든요.”
“그래서 너도 와서 걸어보기로 한 거야?”
“네. 그럼 이 이도저도 아닌 상태를 끝낼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이수는 여전히 혼란이 걷히지 않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신중히 단어를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토록 오랜 고민이 한 달간의 여정 만으로 끝난다면 더 기묘할 것 같긴 해. 그리고 우린 지금 숲 속을 걷는 중이니, 숲이 아니라 나무만 보일 테고 말이야.”
“……?”
“어떤 경험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전체가 보이기도 하더라고. 그것이 어떤 경험이었고, 또 어떤 의미였으며,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거지.”
“…… 그건 누나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예요?”
“당연하지.”
이수는 ‘그런가? 그럼 된 건가?’하는 모호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