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주리 Feb 09. 2023

사건 일기 6

<2023년 2월과 훈련 수료 그리고 청소>

훈련 수료라고 하니까 무슨 군대라도 갔다 온 것 같다. 작년에 전역을 했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 (28살에 예비군 1년 차 스타트라니)


내가 수료한 건 국민내일배움카드 훈련과정이었다.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을 배웠다. 처음에만 해도 출판편집 디자인 분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막연하게 글을 쓰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인드로 살다가, 어떻게 안되고 나니까 너무 늦어 있었다.


그나마 내게 익숙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는 그래도 출판이었다. 읽고 쓰는 것 외에 다른 걸로 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대학교 2학년 -> 1년 휴학 (군대 가려고 했는데 못 갔음) -> 복학 후 졸업 -> 입영 대기 (1년 대기함) -> 입대


남들하고 차별화된 빌드다. 스펙터클하게 느린 템포에도 불구하고 딱히 뚜렷하다 싶은 진로는 없었다. 오만한 생각이지만 나는 내가 졸업 전에 등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등단해도 전업으로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고 나서는 제 풀에 지친 감이 있었고. 별로 관심도 없던 웹소설 분야가 떠오르고 나서는 나도 웹소설을 어떻게든 써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별로 성과는 없었다. 아까운 시간만 축냈다. 모아뒀던 돈 쓰면서 사니까 불안하고 재미있고 편했다. 무서워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겁은 왜 많은지 남들이 어렵다 힘들다 하는 일들은 금방 겁부터 집어먹었다. 전역하자마자 본격적으로 구직을 위해 생각한 분야는 출판편집이었다.


그러나 훈련이 시작되고 보니... 이거 출판이 아니라 디자인 수업이었다.


출판편집을 배우러 간다던 사람이 난데없이 디자인을 배워 왔다고 하면 뭘 그런 걸 배웠냐, 도망치지 그랬냐 하겠지만...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중2병에 걸린 내가 글을 쓸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을 정도로. 훈련 과정은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디자인이라는 걸 배우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좋았다.


그나저나 그림은 공룡 같은 것밖에 안 그려봤으면서, 갑자기 웬 디자인이냐고.


생각이 뒤죽박죽 해졌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 되잖아? 그런데 이건 밥도 먹고 빵도 먹겠다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훈련 수료가 다가올수록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하면 그나마 재밌게 일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웹툰을 그리고 싶었다가, 출판편집으로 그냥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가, 내가 먹고살 수는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를 보니 뿌듯하긴 했다. 좀 더 만들고 싶은 것들도 생겼고, 그냥 뭐라도 쓰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옛날보다는 좀 철이 들었다... 


바쁘게 사는 게 2023년 목표였는데, 난 얼마나 바빠질 수 있을까?


바빴던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까 자꾸 착각을 하게 된다. 하루종일 바빴던 것 같은데, 일과를 끝내고 하루를 돌아보면 별 일 안 했던 적이 많은 거다. 이건 마음이 바빴던 거다... 들뜨고 조급해서 어리바리 우왕좌왕했던 거지. 계획이랑은 담을 쌓고 살아왔지만... 계획적인 태도가 필요할 때다.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해 뜬금없지만 방을 청소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만 내게는 꽤나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예전에 영화 <리미트리스>에서 본 것을 토대로 따라 했는데 괜찮았다. <리미트리스>는 '인간은 일생동안 뇌를 10%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SF 스릴러다. 주인공이 뇌를 100% 활용할 수 있는 알약을 먹고 순식간에 주식계 거물이 되는 내용이다.


사실 브래들리 쿠퍼는 똑똑하지 않아도 얼굴로 먹고살 수 있을 텐데...


물론 우리는 사실상 뇌를 100% 쓰고 있을 것이다. (반박 시 당신 말이 다 맞다.) 과학적인 사실을 떠나 나름대로 흥미로운 영화였다. 주인공은 무명작가였는데, 알약을 먹고 미친 듯이 영감이 떠올라서 하루 만에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써낸다. 심지어 아주 재밌는 글을. (진짜 딱 한 번만 먹어보고 싶다.)


여하튼, 그래서 갑자기 영화 이야기를 왜 했느냐. <리미트리스>에서 주인공이 알약을 먹고 집에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바로 청소다. 내 기억이 맞다면 꼴초였던 주인공이 담배도 피우지 않고 6시간 동안 청소를 한다... 아니, 뇌를 그렇게 야물딱지게 쓸 수 있으면서 청소에 그만한 시간을 투자한다니. 알약 지속시간은 길어야 하루인데. 나도 청소나 해볼까?


내 방은 어느 정도 더럽고 어느 정도 깨끗한 편이다. 그러니까... 더럽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깨끗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태다. 늘 그렇게 유지되다가, 한번 더러워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귀찮음에 한번 굴복하면 두 번은 어렵지 않은 법이니까. '언제 한 번 청소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한 채 다른 걸 하게 된다.


 <리미트리스>를 본 직후에 방을 둘러보니... 정말 지저분했다.


그리고 청소를 했는데 신기할 만큼 개운하고 활기가 넘쳤다. 청소를 할 때까지만 해도 주말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일까 싶었다. 그런데 청소를 마친 뒤 씻고 나오니까 무기력감이 싹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뭔가 도전할 게 있거나,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면 청소를 한다. 내게는 청소가 일종의 알약인 셈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위해 평상시에 방을 어지럽혀 놓는 것...은......아닐...걸?


결론은 청소도 깔끔하게 했으니 좀 더 으쌰으쌰 해야겠다는 얘기다. 얼른 취직해서 돈 벌고 신나게 놀게. 물론 아무리 바쁘고 정신이 없더라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잊지 않겠다. ^_^

작가의 이전글 보드게임 리뷰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