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감상평 7
[ps. 별점 선정 기준]
1점- 돈과 시간을 버렸음 / 1.5- 솔직히 업로드 각 잡혀서 약간 흐뭇하기도 함
2점- 보지 않는 것을 권하지만 누군가 같이 보고 화내줬으면 좋겠음
3점- 그럭저럭 한 쿠키 무비라고 생각함 / 3.5- 쿠키 무비인데 좀 맛있음
4점- CG, 연출, 각본, 내 취향 중 뭔가 하나라도 꽂혔음 / 4.5- 어우 제대로 꽂혔음
5점- 언빌리버블
감상 :
나 농구 모른다.
남자들의 취향이 가장 크게 갈리는 스포츠를 뽑는다면 천하삼분지계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농구, 축구, 야구. 그중에서 나는 한결같은 축구파였다. 비율로 생각하면 [축구90 야구9 농구1] 정도였다. 농구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냐면... 농구 골대를 보면 축구공을 차서 넣어볼 생각을 할 뿐이었다. 친구들과 2시간 가까이 시도한 적도 있고, 무슨 챌린지처럼 지나가다 림이 보이면 한 번씩은 꼭 했다.
초등학생 때 나는 축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 축구를 대단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었지만, 온 관심이 축구에만 쏠려 있었다. 날마다 공을 들고나가서 벽에다가 차며 논다던가, 흙바닥이었던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드리블 연습을 했다. 반에서 축구를 잘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절대 첫 번째로는 뽑히지 않겠지만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만큼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축구선수로서의 전망이 어둡다는 건 초등학생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헉) 그래서 나는 아주 뜬금없지만 아주 필연적인 이유로 촉망받고 누구도 꿈꾸지 않는 직종인 고생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 그치만 공룡이 너무 좋았는걸. 그것도 몇 년 가진 못했지만.
뭐... 어릴 때 장래희망은 쉽게 바뀌니까. 아니면 말고.
시간이 흘러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축구를 했던 걸 조금 후회했다. 키가 안 커서. 농구는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사실 별 관심 없었던 스포츠였다. 중학교 입학 때까지만 해도 나는 또래에서는 큰 편이었기 때문에 키를 걱정할 일은 없었는데... 그게 내 마지막 성장일 줄은 몰랐다. 여하튼 '농구'하면 키가 떠오르다 보니까 내심 아쉬워해 봤다.
그러니까 슬램덩크는 고사하고 농구도 잘 모르는 내가 이 영화를 봐도 괜찮을까 싶었다. '왼손은 거들뿐'이나 '내 이름은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같은 수많은 밈의 출처가 된 '슬램덩크'지만 정작 내용은 하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건 '슬램덩크'도 '농구'도 모르는 사람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후의 감상평. 결론부터 말하자면 '봐도 좋다'이다. 배구는 하나도 모르는 내가 <하이큐>를 보고 두근거렸듯이, '근본 중의 근본' 슬램덩크는 역시나 이름값을 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송태섭이 누군데
내가 알고 있는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였다. 빨간 까까머리의 덩치 큰 양아치. 자막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빙으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강백호가 '카마도 탄지로' 같은 일본 이름으로 나온다던가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만일 그렇게 나왔다면 나는 '불꽃남자 정대만'이고 뭐고 아무것도 연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는 강백호의 등장을 기대했는데, 웬 처음 보는 아이가 나온다. 어린 '송태섭'이었다. 원작을 아예 모른다면 '아, 이 녀석이 주인공이구나'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슬램덩크 주인공 강백호인줄 알았는데 송태섭이었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송태섭의 서사는 가히 주인공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농구를 잘하는 형 준섭에게 가려진 왜소한 체격의 동생이고, 형까지 죽은 뒤에는 줄곧 그림자에 갇혀 지냈다. 그런 그가 농구를 통해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참 찡하게 느껴졌다. 형의 아대로 손목을 감싸는 장면에서는 그가 형과 본인의 꿈이었던 '산왕 격퇴'를 동시에 이루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혹자는 이런 서사를 신파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동으로 느꼈다.
특히 키가 작은 편인 송태섭의 특성상, 커다란 덩치들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드리블하는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키 작은 인물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간다. 그나저나 분명 동생인데 왜 형 같지. 아니, 형 맞나...
그래서 서태웅은 누군데
원작에서 송태섭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영화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개인 서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을 만큼 분량을 많이 차지한다. 실질적인 주인공으로서 극을 이끄는 셈이다. 따라서 원작에서 나름 비중 크게 등장했을 인물들인 '강백호'와 '서태웅'의 활약이 어쩔 때는 조금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둘의 활약을 당연하다시피 느낄 테지만, 내 시점에서는 송태섭의 결정적인 활약이 더 기대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원작의 스토리는 웬만해서는 바꿀 수 없고, 특히나 슬램덩크 같은 두터운 팬층이 있는 경우엔 더더욱 그럴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강백호와 서태웅이 활약하는 시점에서는 둘이 무슨 관계고, 어떤 서사가 있는지 약간이나마 알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영화 중후반부를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난 서태웅이 뭐 하는 애인지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
몰라도 된다. 우리의 주적은 산왕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어쨌든 서태웅이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건 알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아는 사람에게는 더 재밌게 보이고, 모르는 사람도 꽤나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로 제작됐다. 이후의 재미는 영화를 즐긴 사람이 원작 슬램덩크를 보며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겠다.
서태웅과 강백호가 서로 패스를 하지도 않는 라이벌인데, 마지막 순간에 처음으로 패스를 주고받았다던가. 강백호가 제목처럼 '슬램덩크'로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수없이 연습했던 평범한 미들슛으로 버저비터를 쏜다던가 하는 내용은 이후에 알아도 되는 재미다. (나도 찾아봤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농구의 기본적인 룰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농구를 아예 모르면 그것대로 좀 난감할 것이다... 나도 강백호가 자꾸 교체로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이 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축구에서는 한 번 교체하면 그냥 아웃인데, 농구는 자유자재로 교체가 가능한가 보다. 이점에서는 안경 선배(이름 기억 안 남)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몇 번이고 교체를 당하는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심지어 경기 내에서 활약도 안 한다. 그야말로 구름 같은 존재감.
또 내가 알고 있는 농구 경기는 4 쿼터로 나뉘어 있는데, 전-후반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고교 농구는 뭔가 다른가보다.
불쾌한 골짜기를 넘어선 애니메이션
어떤 애니메이션의 경우 움직임이 기묘하게 기분 나쁠 때가 있다. 일부러 그런 느낌을 추구한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공포 애니메이션이 아니고서야 추구하지 않겠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 캐릭터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뭐야,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 하면서 시작한다. 움직임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어떤 장면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연출 부분에서도 몰입감을 잘 끌어올리는 부분이 많았다. 마지막 버저비터에서는 아예 소리가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을 것 같을 정도였다. 연출은 내내 수준급이었다. 장면 전환도 유려하고, 경기장과 회상을 번갈아가는 전개인데도 긴장감이 유지가 잘 된다.
확실히 그림체에서 오는 만족감이 좀 있는 것 같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시원시원 잘 생기고 멋있다. 운동 잘하는 남자 멋있지. 온몸을 감싸고 뛰어다니는 축구와 달리, 난닝구(?)만 입고 뛰는 농구는 캐릭터들의 팔근육과 어깨선이 부각되어서 마초 같은 매력이 더 부각된다.
그리고 북산 친구들은 보정이 좀 있는 건지 다들 머리 스타일이 요즘 스타일이다. 난 일본 특유의 M자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좋다. 아무리 미남미녀여도 머리가 M자인 게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이만큼 길면 좀 잘라라. 가르마를 타던가...
의도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산왕 쪽 인물들이 죄다 까까머리라서, 인물 구분이 좀 어렵다. 근데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적팀도 사연은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북산이잖아. 원작에서는 구구절절 나왔을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런 걸 알려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 오히려 구분하기 편해서 좋달까. 까까머리는 적팀! 까까머리는 적팀이다! 아, 근데 빨간 까까머리는 우리 팀!
농구공이 튀는 소리도 리얼하다. 공마다 공이 어디서 튀어 오르느냐, 무슨 공이 튀어 오르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른데, 농구공이 코트, 운동장, 길바닥 등에서 각각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소리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도 나름 상당한 공을 들인 게 분명하다.
언더독 전성기
그야말로 언더독의 전성시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언더독 스토리가 각광받고 있는 요즘이다. <슬램덩크>는 말 그대로 고전명작이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독립된 영화 자체는 시기에 잘 맞춰 개봉했다는 느낌이 든다. 북산이야말로 진정한 언더독이니까 요즘의 유행에 더욱 잘 맞물리지 않았을까.
내게는 없는 추억을 강제로 만들어서, 억지로 회상하게끔 만드는... 그야말로 소년 만화의 정석이었다.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정대만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자. 우리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나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