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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Feb 23. 2023

<놉>. 우리가 비극을 소비하는 태도

개인적인 감상평 9

<놉>

별점 : 4개

일자 : 2023.02.22

장소 : 집

감상 :


<놉>은 조던 필의 세 번째 장편 작품이다. <겟아웃>과 <어스> 모두 재밌게 봤었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어서 보게 됐다. 조던 필은 사실 내게는 유튜브에서 본 영상들로 더 친숙하다. '작전명 블루베리 파이'라던가 '자기야 인터넷 기록이 자꾸 사라져'같은 영상들은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가끔씩 우스갯소리로 오마주 하곤 한다. 그만큼 엉뚱하고 독특한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각 잡고 영화를 만드니 작품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수상할 정도로 땀이 많았던 그 남자


조던 필의 작품들은 비교적 평범한 주인공을 앞세워, 일상적인 부분에서 소름 끼칠 만한 소재들을 가져온다. 요즘에 이르러 인종 차별은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남은 차별의 순간들을 캐치하여 다루기도 한다. 복선이 치밀하고 군데군데 상징적인 요소들을 잘 집어넣기 때문에 이번 작품인 <놉>도 장면을 허투루 보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전부 주의 깊게 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다.


뭘 열심히 본다고 해서, 복선이니 상징이니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나처럼 평범하게 영화를 볼 뿐인 사람들은 더더욱. 어쩌다가 한 두 개씩 '이런 장면은 저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장면들이 있다. 나는 그런 장면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 또한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틀리는 건 없으니까. 영화의 해석은 영화를 본 관객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장면
침팬지 고디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 중 하나는 침팬지 '고디'에 대한 이야기다. 연예인급 침팬지로 추측되는 고디는 시트콤 촬영 중에 어떤 트리거(헬륨 풍선의 폭발)의 발동으로 격분하여 날뛴다. 이 사고로 당시 시트콤을 촬영하던 배우들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 내에서 이 '고디'에 대한 언급이 조금 뜬금없다거나 이질적일 정도로 배치되어 등장한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고디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장면들을 던지면서 순식간에 관객을 몰입시킨다.


이후 말 목장의 재정적 어려움(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꼬인 듯하다)을 겪는 OJ와 에메랄드가 말을 팔기 위해 주피터 파크에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피터 파크는 고디 사건의 생존자인 주프가 서부시대의 스타일로 개장한 놀이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에메랄드의 산만한 발언으로 협상이 꼬이고 주프는 고디 사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주프는 고디 사건의 생존자이자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였다. 고디 사건으로 받은 주목을 토대로 어릴 때 두 개의 작품을 히트 친 것으로 보인다. 주피터 파크가 서부시대 스타일로 꾸며진 걸 보면 히트작 <꼬마 보안관>의 영광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현재의 주프는 분명 대단히 성공한 배우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어째서인지 OJ의 말들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목장을 사고자 한다.


이 녀석, 도라에몽이 즐겨 먹는 단팥빵처럼 생겼다.


주프는 비행체 '진 재킷'의 정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인물이었다. 그는 진 재킷이 확인될 수 있는 위치에 주피터 파크를 짓고 그곳에서 서프라이즈 쇼를 하며 진 재킷을 이용할 심산이었다. 주프는 고디와의 피스트범(주먹인사)을 떠올리며, 진 재킷 또한 '길들일 수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주프가 고디에게서 살아남았던 이유는 주프와 고디가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위치를 공교롭게도 식탁보가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연인지 진 재킷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또한 그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비극의 소비


주프가 진 재킷을 길들이고자 했던 방법은, 일정 시간대에 OJ에게서 산 말을 광야로 달리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침착했던 말 '럭키'는 달려 나가지 않았고, 배가 고팠던 진 재킷은 주피터 파크에 있던 모든 관객을 그대로 홀라당 집어삼켜 버린다.


진 재킷을 생물체로 표현한 것 또한 참신했다. UFO라고 하면 보통 비행접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진 재킷은 비행접시의 모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생명체로써 등장한다. 조던 필의 특징인 클리셰를 비트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진 재킷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전혀 달라지지만.


주프는 비극의 피해자이자 목격자다. 끔찍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엄청났던 인기를 잊지 못한, 비극의 첫 소비자인 셈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주피터 파크에서 (말의 기준으로는) 비극을 서프라이즈 쇼로 만들어내는 창시자가 된다. 비극을 소비하는 문화는 어떤가. 진 재킷이 도망치는 말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이를 '나쁜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나쁜 기적이라는 건 모순된 말이지만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그게 비극이든 희극이든 결국 소비된다.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것이 주목을 받는 것은 기적이지만, 그 관심이 얼마가지 않아 모두 사라지는 게 비극이 는 의미일 것이다.


영화는 이 소비를 멈추는 방법은 바라보지 않는 것뿐 (진 재킷의 파훼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구경거리로 착취되고 있던 침팬지 고디가 결국 폭발한 것은, 인간이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졸지에 나쁜 기적의 수혜자가 되어버린 주프가 성장하지 못한 채로 그 시절에 갇혀 사는 까닭은, 이미 소비되어버린 자로서 옳고 그른 일의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비극이 벌어졌을 때, 일정기간 매체에서 소비되다가 불현듯 그 모든 일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곤 한다. 한 번 소비된 사건을 재조명하는 방법은 더 스펙터클하고 자극적인 사실이 재발견되는 것밖에 없다. 결국 사건의 본질 자체가 흐려지고 중독적으로 자극을 찾거나, 혼란만을 추구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현상 여기서 비롯된 것이겠다.


나쁜 기적과 조던 필

진 재킷의 퇴치는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지만, 헬륨 풍선으로 해냈다. 어쩌면 침팬지 고디가 헬륨 풍선을 매개로 격분했던 것과 대치되는 듯하다. 주피터 파크에 묶여있던 거대한 꼬마 보안관(주프의 어린 시절을 형상화한 듯한) 풍선을 하늘로 띄워 올려서 진 재킷이 삼키게 만든 것이다. 헬륨이 어떤 데미지를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풍선을 통째로 집어삼킨 진 재킷이 말 그대로 풍선처럼 펑 터진다...


보안관 풍선 인형은 주프의 어린 시절을 상징한다. 주프가 고디 사건의 비극을 겪게 된 이유는 헬륨 풍선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주프가 꼬마 보안관 시절에 갇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진 재킷이 주프의 헬륨 풍선을 먹고 터져버린 건, (주프는 이미 죽었지만) 주프의 집착 같은 게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다.


빵 터져서 흐늘거리며 떨어지는 진 재킷을 취재하기 위해, 그러니까 또 다른 '나쁜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주피터 파크로 몰려든 수많은 기자들을 뒤로한 채 영화는 한 장의 진 재킷 사진만을 남기고 끝이 난다.


진 재킷의 결전폼. 이른바 '굶주린 진 재킷'


조던 필이 <겟아웃>과 <어스>에서 보여주었던 강점. 현실 풍자에 대한 직관적이고 뚜렷한 메세지는 그대로인 채로 SF적 요소를 그대로 가져온 느낌이었다. 진 재킷에 대한 직선적인 설명이 없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직관적이라기보다는 괜히 의문스럽기 때문에 호불호는 갈릴 것 같다.


중간중간 점프스퀘어(갑툭튀)가 등장하기 때문에 심약자는 보기 어렵겠지만 (심한 편은 아니다) 영화 전체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영화 돌려보며 해석해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나는 '나쁜 기적'과 비극의 소비에만 초점을 두고 영화평을 썼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으로서 재밌게 소비할만한 영화다. 조던 필의 네 번째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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