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후반에 남자들끼리 놀이공원 가는 게 뭐 어때서>
에버랜드에 다녀왔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친구가 인터넷 쇼핑하는 걸 구경하고 있다가 뜬금없이 자유이용권 할인 행사 중인 페이지를 눌렀을 뿐이었다. 비수기 중의 비수기여서 가격이 쌌고, 마침 시간이 되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고, 마침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고, 마침 돈도 있었다.
남자들, 그것도 에버랜드에 가본 적도 없거나, 한 번 가봤거나, 너무 어릴 때 가본 게 전부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슨 대단한 계획을 세우겠는가. 출발 전날까지 그럴듯한 계획도 준비도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T익스프레스를 타는 것. 에버랜드의 상징이자 남자들의 로망. 정준하가 짜장면 날려 보낸 그곳.
기상 예보를 확인하니,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릴 때 서울랜드에서 비 맞으면서 롤러코스터를 탔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히려 재밌었지. 비가 와도 괜찮다. T익스프레스만 탈 수 있다면. 우리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그래서 못 탔다. 이 사실을 전날 밤에 확인해서... 표 취소하기도 좀 그렇고. 어떻게든 재밌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시무룩해 있는 와중에 비가 잔뜩 왔다. 천둥 번개까지 치면서. 내일 아침에는 그칠까, 비가 계속 온다면 우리 괜찮을까?
하지만 그래서 재밌게 노는 것을 포기한다면 남자가 아니지.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꼭 챙겨 먹는 Y와 그냥 밥 먹는 게 좋은 나는 일찍 만나서 아침밥을 먹었다. Y에게 차가 있어서 가는 길이 편했다. G를 깨우고(늦잠) 출발해서 놀이공원 정문에서 I와 만났다. 가는 길에 부슬비가 내렸지만 금방 그쳤다. 날씨가 흐리멍텅한 게, 오히려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에버랜드는 T익스프레스에 로스트 밸리까지 쉬고, 각종 시설들이 봄 시즌 전 점검 중이었다. 사람도 정말 없었고. 그러니까 빈집을 털러 들어간 것까진 좋았는데, 빈집 안에 금품이 없는 상황이었던 거다. 내가 기억하기로 보통의 에버랜드는 입장시간 전부터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서 기다리고 있고, 놀이기구 하나를 타려면 최소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옥의 장소였다.
나는 뭔가를 기다리는 것에는 도가 튼 인간이어서 기다림 자체에는 별다른 데미지가 없다. 다만 같이 기다리는 사람의 불편한 기색에 지나치게 공감한다. 다리가 아프다면 나도 아픈 것 같고, 짜증 난다 하면 괜히 나도 짜증 나는 것 같고...
그런데 이번엔 하루종일 기다린 시간을 모두 합해도 10분이 넘을까 말까였다. Q-PASS를 무한대로 사용하는 느낌이랄까... 스마트줄서기에 레니찬스에 뭐 별의별 기능들이 많다고 그랬는데 아무 의미 없었다. 계획도 의미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보이는 놀이기구에 들어가면 기다리지 않고 그냥 탈 수 있었다.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클 만큼 다 크고, 동심이라곤 마를 대로 말라버린 남자들이었단 거겠지. 회전목마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더 큰 자극과 스릴을 원할 뿐이었다. 같은 기구를 반복해서 탈 수 있으니 재미는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오히려 놀이기구를 타면 체력이 회복됐었는데.
T익스프레스를 제외하고, 우리의 에버랜드 나들이는 성공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진짜 비싸다!) 동물들을 보러 사파리에 갔는데 이 녀석들 죄다 잠들어있었다. 눈을 뜨고 얼굴을 들고 있었던 애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동물들을 보는 건 늘 즐겁다. 한 편으로는 짠하기도 하고 다 풀어주고 싶다.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중에 다루겠다. 개인적으로는 동물원을 반대한다. 아쿠아리움도 그렇고.
점심 무렵 동물들을 구경하고 소화도 됐을 겸, 본격적으로 스릴 넘치는 친구들이 개장을 했다. 썬더폴스라던가 더블 락 스핀 같은 놀이기구들. 우리끼리 영혼 탈곡기라고 부른 더블 락 스핀은 위용부터가 좀 웅장했다. 그리고 탈 때 차마 말할 수 없는 부위가 좀 아팠다. (아니? 말할 수 있는데? 어깨가 아팠던 건데?)
썬더폴스에서는 홀딱 젖었고, 집에 갈 때까지도 엉덩이가 마르질 않았다. 아마존 익스프레스에서 대부분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청바지를 입어서 엉덩이 젖은 게 보다 눈에 띄었는데, 어쩌겠는가. 누가 봐도 놀이기구 타서 젖은 사람이었을 거다. 그렇게 보였어야 했다. 아니었다면... 그래! 나 지렸다. 어쩔래.
그러니까 에버랜드에 놀러 갈 때는 젖어도 잘 티가 안 나는 바지, 금방 마르는 바지를 입는 게 좋다. 신발도 방수거나 잘 마르는 신발이면 더 좋고... 발냄새 레전드.
놀이동산을 통틀어 생각해 보면 여태껏 네다섯 번은 가봤지만, 놀이기구가 질릴 때까지 탄 건 처음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너무 피곤해서 헛소리가 막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점점 놀이동산에 갈 일이 없어질 거라는 걸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었다. 언제 또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을까. 다들 취직하고 연애하고 결혼...(할까?)하면 더 바빠질 테니까.
T익스프레스는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우리는 다들 이미 더 스릴 넘치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멈출 수도 없고, 내릴 수도 없는...